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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70)] 추신구라(忠臣藏)

어느 나라에나 충신 열사의 이야기는 있다. 충효가 정치, 사회의 기본 윤리였던 동양 전통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다. 우리에 비해 영향력이 약했다고는 하지만 크게 보아 유교사회에 속했던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1702년 12월 14일밤 에도(江戶)에 부슬부슬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중무장한 46명의 ' 로시'(浪士,떠돌이 무사)가 기라 요시나카(吉良義央)의 저택을 습격했다. 야음을 틈타 기습에 성공한 이들은 기라의 목을 벤 후 시나가와(品川)의 센카쿠지(泉岳寺)로 물러나 바쿠후(幕府)의 처분을 기다렸다.

사건의 발단은 1년전의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고베(神戶) 지역인 아코한(赤穗藩)의 영주인 아사노나가노리(淺野長矩)는 에도성안에서 칼을 빼 들고 기라에게 상처를 입혔다.

당시 아사노는 이름만 남은 교토(京都)의 조정이 보내는 사신의 접대역이었고 기라는 의전 수석격인 ‘고케(高家)’였다.

‘쇼군(將軍)’이 집무하는 에도 성안에서 칼을 빼 직속상관을 베려고 했으니 이만저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청와대에서 의전 비서관이 의전수석에게 총을 쏘아 상처를 입힌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으로 아사노에게는 할복령이 내려졌고 아코한은 해체됐다. 가신들은 실업자로 전락, 가족을 이끌고 뿔뿔이 흩어졌다. 원수를 스스로의 손으로 처단하는 ‘아다우치(仇討ち)’나 ‘가타키우치(敵討ち)’가 성행했던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이들이 복수에 나서는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가신의 우두머리인 ‘가로(家老)’ 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內藏助)는 절치부심을 거듭하면서 철저히 복수의 움직임을 숨겼고 기라측의 감시의 눈길이 풀어진 틈을 타 옛 가신을 불러 모아 야간기습을 감행, 마침내 주군의 원수를 갚았다.

바쿠후는 이들에 대해 할복령을 내렸다. 발단이 된 아사노의 할복이 바쿠후의 조치였다는 점에서 아코 로시들의 복수는 바쿠후의 결정에 대한 정면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명령대로 모두 할복 자살, 센카쿠지의 묘지에 묻혔다.

이 사건은 무사의 도덕률과 관련, 일본 유학자들 사이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독실한 주자학자였던 무로 규소(室鳩巢)는 아코 로시들의 행동을 크게 찬양하면서 ‘아코기진로쿠(赤穗義人錄)’를 저술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 무사도의 고전으로 유명한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의 ‘하가쿠레(葉隱)’는 이들의 행동을 혹평했다. 주군인 아사노가 숨진후 곧바로 행동에 나서 장렬하게 숨졌어야 하는데 시간을 끌었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또 야간기습을 감행하고 센카쿠지에 모여 바쿠후의 처분을 기다린 것은 영리하고 지혜로운 행동이긴 하지만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죽을 곳을 찾는 무사의 본령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나 바쿠후의 처분과는 달리 서민들은 이들의 행위를 충의의 표본으로 받아 들였다. 바쿠후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전국에 퍼졌다.

더욱이 당시 성행한 ‘가부키(歌舞伎)’나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 인형극)’등 대중예술이 이 사건을 즐겨 다루어 대대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런 인식은 더욱 굳어졌다.

1748년에 초연된 닌교조루리 ‘가나데혼추신구라(假名手本忠臣藏)’는 이 사건을 다룬 대중예술의 고전으로 꼽힌다. 나중에 같은 이름의 가부키로도 각색됐고 약칭인 '추신구라'의 이름으로 수많은 소설과 연극, 영화가 만들어 졌다.

'추신구라'는 ‘구라(藏)’가 곳간을 뜻한다는 점에서는 은유적으로 '충신들'로 해석될 수 있지만 원래는 오이시 구라노스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NHK는 99년 대하드라마를 방영했고 TV도쿄가 같은해 연말 특집으로 12시간짜리 드라마로 방영하는 등'추신구라'는 지금도 수없이 새롭게 만들어 지고 있으며 그때마다 국민적 인기를 끈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정서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반면 '추신구라'가 그리고 있는 충절은 우리 눈에는 극히 제한된 의미로 비쳐진다. 중앙정부의 뜻을 어긴 작은 지방 영주에 대해 가신들이 보인 무조건적 충성은 왕조와 군주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충절이나 국가에 대한 현대적 충성과도 동떨어진다.

오랫동안 한(藩)이 동질성의 근간이었던 전통이 지금도 ‘구니(國)’라면 우선은 봉건시대의 제후국 단위를 가리킬 정도로 뿌리깊게 남아 있음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에서는 대형 의혹사건이 터질 때마다 회사나 관청 등 조직의 윗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중간간부나 측근이 자살하는 예가 끊이지 않는다. 국가 전체의 대의보다는 조직에 대한 충성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추신구라'의 세계와 그대로 닿아 있다.

입력시간 2001/08/0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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