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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 러시아 방문, 북·중·러 협력체제 굳히기 분석

‘21세기에 이루어지는 19세기식 여행.’

보름이 넘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시베리아 여행을 두고 모스크바 외교 소식통들이 붙인 말이다.

북한-러시아 정상회담을 위한 김 위원장의 이번 여행은 ‘북한은 여전히 알수 없는 나라’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짙게 남기고 있다. 하루 정상회담을 위해 9,300㎞의 거리를 비행기가 아닌 기차로 여행하겠다는 발상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데다 여행 중에는 과도한 경비가 계속 비난 받았다.

그의 방러 여정을 다루는 러시아내외 언론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 국가수반 자격으로 세 번째 외국 여행인 이번 방문에서 김 위원장은 북한과 러시아의 공고한 유대를 재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미사일 개발을 둘러싸고 ‘평화적인 목적’이라는 해설을 붙인 북한의 의도에 러시아가 공감함으로써 앞으로 북-미 협상에서 북한은 일정한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가지 포석, 지나친 경비에 비난도

김 위원장은 7월 26일 아침 북한과 접경한 극동 하산에 도착하면서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여행의 첫 발을 디뎠다.

콘스탄틴 풀리콥스키 극동연방지구 대통령 전권 대리인의 안내를 받으며 시작한 ‘대장정’은 하바로프스크-치타-울란우데-이르쿠츠크-크라스노야르스크-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예카테린브르그로 이어졌으며 김 위원장은 러시아 국경을 넘은 지 9일만인 3일 저녁 모스크바 야로슬라브 역에 도착했다.

여정은 국가수반 여행으로는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로 길었지만 옴스크에서 하루 묵으며 현지 군수공장 등을 둘러본 것을 제외하면 경유지에선 많아야 1시간 가량 머문 데 그쳤다.

아무래도 관심은 그가 왜 철도 여행을 택했느냐는 데 있다. 우선 제기되는 것은 안전문제. 1983년과 지난해 5월, 올해 1월 중국 방문 때마다 그는 모두 열차편을 이용했으며 열차나 철로 사고는 대처가 가능하지만 비행기는 예측 불허의 상황이 많아 김 위원장이 꺼린다는 게 이유다.

소식통들은 김 위원장은 북한 내에서도 장거리를 이동할 때는 반드시 전용 열차를 이용했으며‘열차 이용’은 김 위원장 안전을 책임지는 호위사령부와 국가안전보위부의 주요 원칙 가운데 하나라고설명했다.

일부에서는 김 위원장이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 이용을 기피한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지만, 설득력을 얻지는 못하는 편이다.

열차여행은 아버지인 고 김일성 주석의 선례를 따르기 위한 낭만적인 결단이라는 추측도 있다. 수 차례 옛 소련을 방문했던 김 주석은 1984년 5월에 청진을 출발, 특별열차편으로 7일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적이 있다.

당시 김 주석은 지린(吉林), 무단장(牧丹江) 등 중국 북동부 지역을 거쳐 이번 김 위원장의 동선과는 다르지만 치타-울란우데-크라스토야르스크-모스크바로이어지는 후반의 행선은 비슷하다.

4일 정상회담 직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이 점을 두고 “당신 아버지가 했던일을 해냈다”며 김 위원장을 추켜세웠다.

이번 열차여행은 두 나라 경제협력 현안 가운데 하나인 TSR과 한반도 종단철도(TKR)의 연결 문제와 관련지어 해석할 수도 있다. 한반도를 러시아는 물론 유럽과 철로로 이어주면서 적지 않는 물류 증대를 낳을 이 사업의 현장을 체험해보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한편 일본과 유럽의 일부 언론들은 장거리 열차여행을 통해 김 위원장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국내 정세가 자신이 러시아 시골을 시속 40마일도 안 되는 속도로 1주일 여행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안정돼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미국과 협상을 앞두는 등 국제 무대에서 입지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김 위원장이 유별난 이번 여행을 통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보려 한 것이라는 추측도 하고 있다.

하지만 여행 동안 지나친 경비와 언론의 차단은 계속 비난거리였다.

특히 4일자 러시아 언론들은 김 위원장이 도착하는 모스크바 야로슬라브 역에서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바람에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며 과도한 경호를 일제히 문제 삼았다.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는 ‘공산주의의 망령’이라는 1면 톱기사로 북한이 요구한 시대착오적인 경비를 비판했으며 코메르상트도 베이징에서 오는 열차가 최대 6시간까지 연착하는 등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고 전했다.

경유지 옴스크역에서 촬영했다며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가 보도한 ‘특별열차 차량의 총탄 흔적’도 과도한 언론 접근 차단에서 나온 결과로 볼 수 있다.


미사일 개발 문제, 러시아 지지 이끌어내

이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4일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날 회담 후 채택한 8개항의 공동선언에서 북한은 대미협상 ‘메인카드’인 미사일 개발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도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라는 실리를 챙긴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하 북한)의 로켓 계획은 순수히 평화적인 목적을 띠고 있으며, 따라서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는 국가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않는다” “러시아는 북한의 입장을 환영한다”고 명시한 공동선언 2항의 대목은 ‘미사일 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미국과의 향후 협상에서 북한이 여러 요구사항들을 관철시킬 수 있도록 적지 않은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러시아의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는 북한이 러시아에 대한 대외 채무관계를 명시하는 등 일정하게 양보했다.

과거 경제협력 사업들을 구체화하는 작업들은 “과거양국간 채무관계를 감안해 이뤄질 것”이라는 조항은 사실상 북한이 러시아에 지고 있는 38억 루블의 부채를 경협과 연계시키겠다는 러시아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한편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지난해 6월 남북 공동선언에 입각해 독자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한 국민들의 노력에 대한 지지가 한반도 통일에 기여할것이라는 데 합의한다”고 지적하는 수준에 그쳤으며, 푸틴 대통령이 직접적으로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요청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 주한미군 철수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북한의 설명에 러시아측이 이해를 표명함으로써 한반도 안보문제를 풀어가는데 부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우리에게 긍정적인 측면은 북한과 러시아가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 연결사업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이번 북한과 러시아의 정상회담과 9월로 예정된 장쩌민(姜澤民) 중국 주석의 방북이 이뤄질 경우 한반도의 현안이 북-중-러의 3각관계 협력과 한-미-일 공조의 대립구도 속에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관측이 일부에서 나오고있다.


북한-러시아 공동선언문 요지


▦ 한반도 문제

통일문제에 대해 독자적이고 평화적인 해법을 찾으려는 남북한 국민의 노력을 지지하며 외부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데 합의.

러시아는 지난해 남북한 정상이 이룬 합의를 존중하며 남북한 문제 해결을 돕는데 건설적이며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음을 밝힘. 북한은 주한 미군 철수가 절박한 문제라고 주장했으며 러시아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의 입장에 ‘이해’를 표명.


▦ 북한 미사일 개발 및 ABM 협정

북한은 미사일 프로그램이 본질적으로 평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는 어떤 국가에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며 러시아는 북한의 입장을 환영.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자 공격용전략무기 감축의 근거라는 데 유의하며 새 세기에도 국제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방법으로 협력하겠다고 결의.


▦ 경제ㆍ군사 협력

정치, 경제, 군사, 과학기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쌍방 협력을 장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에 합의. 특히 양측은 현재의 채무문제 해결을 기초로 전력분야 등에서 합작기업을 재건하는 계획 추진키로 합의


▦ 세계 안정

새 세기에 러시아와 북한은 세계 안정을 유지하고 모든 구성원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법과 평등의원칙, 상호 존중, 상호이익을 위한 협력에 근거한 새롭고 공정한 세계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천명.

특히 세계 문제에서 유엔이 더욱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유엔과 다른 원칙, 국제법의 규범을 부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막아야 한다고 강조

김범수 국제부기자 bskim@hk.co.kr

입력시간 2001/08/07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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