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수상하다] "전기료가 무서워요"

가혹한 누진제로 서민들 '벌벌'

두 아이를 키우는 고진애(32ㆍ서울 용산구 서빙고동ㆍ가명)씨는 요즘 밤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네살바기 큰아이와 돌을 갓 넘긴 둘째가 열대야로 온몸에 땀띠가 나는 바람에 샤워를 해주고 몸을 닦아 주느랴 밤잠을 설치기 때문이다.

고씨 가족이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7월분 전기요금청구서 때문. 고씨는 두 아이의건강을 위해 올 봄 큰 맘 먹고 에어컨을 장만했다. 워낙 더위를 못 참는 성격인데다 아이들을 위해 초여름부터 에어컨을 가동했는데 그만 전기료가 두 배 이상 나온 것이다.

지난해 같은 달 고씨 집은 214㎾h를 써 총 2만4,220원 가량의 전기료를 냈다. 그런데 올해에는 날씨가 일찍부터 더워져 에어컨을 켰더니 전력소비량이 360㎾h로 늘었고, 요금은 무려 6만5,430원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고씨는 해당 전력 공사측에 문의를 해봤더니 누진제 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이후 고씨는 낮에는 절대 에어컨을 켜지 않고, 대신 몸은 힘들지만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 등에 가서 아이 쇼핑을 한다. 하지만 밤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고씨는 아직도 비싼 돈을주고 산 에어컨을 돌려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에 빠져 있다.


애물단지 된 에어컨 "안켜고 버텨요"

잠 못 이루는 한여름 밤을 보내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경기가 극도로 위축된 데다 대폭 전기료 인상을 의식한 서민들이 에어컨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다시피 한 에어컨이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은 다름아닌 지난해 11월 한국전력이 산업자원부가 제정한 조례에 따라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 폭을 대폭 확대했기 때문이다.

산자부는 지난해 주택용 전기 요금을 3.3% 인상했다. 단순히 숫자상으론 그리 높은 인상 폭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자부는 ‘서민들에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전기 절약 효과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월 300㎾h 이하 주택용 전기료를 동결하는 대신, 300㎾h 이상 쓰는 가정에 적용하는 누진율을 대폭 올렸다.

이로인해 최저 요금(㎾h당34.50원)과 최고 요금(㎾h당 639원)간의 누진 폭이 당초 12배에서 18배로 확대했다.

예를 들어 월 250㎾h을 쓰던 가정이 여름철 에어컨을 써서 사용량이 450㎾h로 늘어났을 경우 월 전기료가 3만1,240원에서 10만2,780원으로 늘어난다. 사용 양은 80% 증가했는데 전기 요금은 무려 230%나 폭증하는 식이 된 것이다.(누진율은 표 참조)

산자부는 지난해 11월 인상 당시 주택용을 사용하는 국내 전체 가구의 91.2%가 월 300㎾h 이하를 사용하고 있어 서민들에게는 별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것은 전기 수요가 적은 봄 가을 겨울을 포함한 1년간 평균치를 가정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전력 수요가가장 많은 여름철이다. 하절기에는 소비 전력이 많이 소요되는 에어컨이나 냉장고 가동이 늘기 때문에 전력 사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서민 가정도 여름철 냉장고와 에어컨을 가동하면 300㎾h 이하를 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 일이다.

실제 한전 측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올해 여름 월 300㎾h 이상을 사용하는 가구수는 산자부가 예상했던 8.8%의 두배나 되는15.6%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사용량을 따져 봐도 여름철에 누진제의 기준이 되는 월 300㎾h 이하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전력 비수기 때 주택용 전기 사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냉장고다. 일반적으로 500리터급 냉장고의 경우 봄 가을 겨울에는 월80~90㎾h의 전력을 소비한다.

하지만 여름철이 되면 문 개폐 횟수가 늘고 열효율이 급격히 떨어져 월 110~120㎾h 정도를 소비하게 된다. 여기에 전등이나 TV 라디오, 컴퓨터 등의 각종 전기 도구를 조금만 사용해도 월 전력량은 250㎾h를 쉽게 넘는다.

문제는 역시 에어컨이다. 시중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가정용 18평형 슬림형의 경우 시간당 소비전력은 2.1㎾다. 한여름 낮과 밤 동안 하루 3시간 평균 가량 가동할 경우 하루 소비 전력은 6.3㎾h(2.1㎾hⅹ3시간)다.

이를 한 달로 계산하면 에어컨으로 인해 발생하는 월 소비전력량은 약 180㎾h나 된다. 가정에서 에어컨을 가동할 경우 300㎾h 이하를 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예전 사치품으로 취급됐던 에어컨은 이제는 준 필수품이 된 가전 제품이다. 올해도 판매율이 30%를 상회, 현재 국내 가정에만 약800만대 이상이 보급돼 있다. 여름철 에어컨을 켠다고 해서 과소비 가정으로 분류, 높은 누진율을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유흥업소 전기료보다 비싼 가정용 전기

전기 요금 문제가 단순히 누진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일반 가정에서 쓰는 주택용 전기 요금이 업소에서 영업용으로 사용되는 일반용 전기요금 보다 높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문제다.

산자부가 정한 국내 전기 요금 체계는 사용 용도에 따라 주택용 일반용 산업용 농사용 교육용 가로등 등 6개 분야로 나눠져 있다.

그런데 종류별 전기 판매 단가를 살펴보면 가정에서 쓰는 주택용이 ㎾h당 112.55원(심야전력 제외)으로 사무실이나 업소 같은 영업용으로 사용되는 일반용(108.70원/㎾h)보다 더 비싼 요금을 적용 받는다.(종별 판매단가표 참조)

다시 말해 가정에서 아이들의 공부방에 켜는 전기 값이 나이트클럽이나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의 전기료 보다 비싸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판매원가는 주택용이 약간 높다지만 그렇다고 일반 가정에서 쓰는 전기가 영리를 위해 쓰는 것보다 비싸다는것은 쉽게 이해가 안 된다.

현재 국내 전기 요금의 평균 판매 단가가 76.97원인 것을 감안하면 정부는 주택용에서 남은 46%의 추가 이익으로 산업용과 농사용 전기의 손실분을 보전해 주고 있는 셈이다.

산자부의 한 관계자는 “주택용의 누진제는 서민 부담은 늘리지 않으면서 전기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일부 상류층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는 서민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소 문제가 있어 누진 폭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정책 보완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2일 “누진제를 완화할 경우 전력을 적게 쓰는 서민층의 부담을 늘릴 수 밖에 없어 누진제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며 “현형 기조를 유지하면서 보완하는 선에서 조정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정부 당국의 시각에 대해 전력 노조측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이들은 최근 일련의 전기료 인상은 2003년 ‘한전 분사 및 민영화’를 핵심으로 하는 전력산업구조개편 작업 추진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라고 지적한다.


"요금인상은 저력기금 조성 사전 포석" 주장

전국전력노동조합 양성호 교육문화국장은 “정부는 유가 급등으로 인해 주택용 누진제를 확대했지만 실제로 유류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발전량의 8.2%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하다”며 “요금 인상은 장차 민영화를 앞두고 벌어질 전기료 대폭 인상과 그에 앞서 전력산업기반기금 조성 마련을위한 사전 포석”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말 기준 나라별 전기 요금은 한국을 100으로 볼 때 프랑스 107, 대만 108, 미국 112, 영국 131, 일본 278 등으로 나타났다.

전기 요금이 국민 소득에 비해 턱없이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원가 이하로 제공하는 농사용이나 산업용을 포함한 것으로, 누진제를 적용하는 주택용만 놓고 보면 선진국 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동부이촌동이나 서빙고동 같이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전기 요금에 외국인 거주자들의 반발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국민들의 전기 절약에 대한 의식이 약해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터무니 없는 누진제로 막으려 것 또한 옳지못하다. 서민들의 아끼는 지혜, 그리고 당국의 합리적인 전기 요금 가격 정책이 함께 취해져야 할 때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8/08 14:57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