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종로구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한ㆍ일 강제 합병은 누구나 생각하기도 싫은 민족적 치욕이다. 그러나 무력하게 국권을 잃었다는 자괴감에 짓눌려 지난 시절을 마냥 덮는 어리석음은 또한 경계할 일이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요, 미래의 나침판이라 했던가.

1911년 일본군 기병참모 요시다가 작성한 보고서 ‘한ㆍ일병합시말’에 따르면 일본군은 병합 직전 함경도에 있던 2사단 기병대를 훈련, 토벌작전에 나가는 것처럼 속이고 서울로 비밀리에 끌어들여 시위사터에 대비한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경비지침과 훈시는 일본이 얼마나 조선을 깔보았고 또, 조선조정이 무능하게 대처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병합하려면 위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기병이 실로 적당한 병력이다. 미개의 인민을 진압하려면 외관상 위엄있는 기병이 제격이다’ ‘조센징은 교활하고 기어오르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니 단호하고 엄정하게 위세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병합 발표 뒤, 민중의 정황을 적은 대목에서는 ‘우매한 조선인들은 나라 멸망따위는 관심이 없다.

단지 징수당할 조세가 적어질 것을 열망할 따름’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고 있다.

1910년 8월 22일. 그날도 요즘 처럼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같은날 오후,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흥복헌(興福轅)에서 순종(純宗)이 어전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왕조 마지막 어전회의이기도 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어전회의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 다음, 순종이 다음과 같은 조칙(詔勅)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ㆍ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서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이로 생각하고 이에 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순종은 전권을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일임할테니 통감 데라우찌를 만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는 동안 대신들은 아무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물러난 이완용은 오후 4시에 데라우찌 통감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조약문서에 조인했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前條)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조선을 일봉제국에 합함을 승낙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날은 이처럼 어이없이 저물어갔다.

우리는 망국의 모든 책임이 마치 이완용을 비롯한 이른바 매국의 오적(五賊)에게만 있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매국이 분명하다면 그들을 대신으로 만든 임명권자의 책임 또한 왜 묻지 않는 것일까?

1884년 겨울 서울에서 고종(高宗)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미국인 퍼시발 로웰은 이렇게 고종에 대한 인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뛰어나게 부드러워 보였다. 그것은 첫 눈에 호감을 갖게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은 좋지만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황태자인 순종 역시 순진하고 무기력한 나머지 매국의 대신들에게 놀아났다고만 쓰고 있다.

“합병은 천명(天命)이다. 지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도다”며 장탄식만 하였으니…, 좀더 영특한 임금이었다면 나라의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위대함을 창조한다’는 뜻의 대조전(大造殿)! 그곳에서 오백년 왕업이 막을 내렸다. 한 많은 역사의 현장이다.

입력시간 2001/08/1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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