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남북대화 물꼬, 언제 뚫리나

당국간 접촉 동결상태

요즘 통일부의 대북 대화창구는 한산하다. 민간 및 경협 차원의 대북 접촉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당국간 대화는 3월 북측의 일방적인 연기통보로 제5차 남북장관급회담이 무산된 이후 사실상 동결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물위는 물론이고 물밑 접촉도 없다”면서 대화 단절 상황을 표현했다.

지난달 현대와 북한이 금강산 육로관광에 합의하면서 예고했던 7월중 남북 당국자 회담도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8월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일 동안 러시아를 다녀와 사실상 공친 느낌이다. 9월 초에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방문이 예고돼 있어 남북대화의 답보 상태가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대화 중단 상황이 장기화하자 ‘햇볕정책’에 대한 국내여론의 지지도 흔들리는 분위기이다. 국민들은 특히 정부가 혈세인 ‘남북협력기금’까지 동원, 금강산 관광 대가 2,200만달러를 지불했는데도 북측이 대화에 나서지 않자 실망이 컸다.

여기에 8ㆍ15 광복절을 맞아 방북한 민간대표단 마저 그토록 만류했던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행사에 참석, 남남(南南)갈등을 노정한 데 이어 일부 인사는 김일성 주석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한 뒤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자”는 글을 남겨 파문을 증폭시켰다.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이뤄지고, 북측이 이를 빌미로 자제해왔던 대남 비방을 재개하면 정체 국면인 남북관계가 경색될 수도 있다.


미국만 쳐다보는 북한

남북관계가 꼬이게 된 1차적인 원인은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의 대북 강공 드라이브 정책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이 북한을 재평가하려 하자 북한은 체제의 긴장성을한층 높이는 한편, 기존의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의 종속변수로 돌리면서 미국과의 기 싸움을 시작했다.

북한은 미국이 6월6일 미사일, 핵, 재래식 무기 등 3가지 의제를 갖고 북한과 대화에 나서겠다고 발표하자, 곧장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보상부터 하라”며 정면 대결의지를 분명히 했다.

북한은 이후 “남조선을 침략 전쟁의 연습장으로 만든 미제”(7월30일), “미국이 떠드는 미사일 위협설은 궤변”(8월2일)등 사안별로 대미 공세를 퍼부었다.

북한은 심지어 남북 경협문제인 금강산 관광사업 까지 미국 탓으로 돌리고 있다.

금강산사업의 북측 책임자인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평화위)는 8일 “금강산 사업이 미국의 방해로 인해 위기에 봉착했다”면서 “현대 그룹의 와해 위기도 남한을 강점 중인 미국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북한은 5개월째 단절된 남북관계에 대한 책임도 미국에 떠넘겼다.


대미 협상의 마지노선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최근 성명에서 “최소한 클린턴 전 행정부 집권 마지막 시기에 취했던 입장 수준에 도달해야 조미 대화의 재개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바라는 북미대화의 전제조건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포기이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조명록(趙明祿)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방미에서 채택된 ‘북미공동 코뮈니케’를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을 처음부터 철저히 검증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미국의 대북 정책의 기저에는 부시 행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중인 미사일방어(MD) 체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은 내심으로는 MD의 주요 명분인 북한 미사일 위협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미국의이 같은 전략적 공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번 러시아 방문에서 2003년까지 미사일 개발 동결을 선언했다는 분석도 있다.


서울답방은 마지막 카드

올해 남북문제의 최대 이슈인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북미관계와 관련이 많다.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김 위원장이 미국과의 문제가 윤곽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서울을 방문하긴 어려울 것”이라면서 “김 위원장은 답방 문제를 남한이 아니라 미국에 던질 ‘마지막 카드’로 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도 5월초 평양을 방문한 예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와의 회담에서 2차 정상회담의 시기와 관련, “미국의 대북 정책 검토가 끝나기를 기다려 자주적으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미 관계가 풀리더라도 남한 내 상황이 김 위원장의 답방을 늦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여야가 격돌하고 여기에 정부와 언론의 관계도 악화된 상태에서 남한 주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북한 권력 내부의 강경파가 경호 등 안전문제를 강조하며 김 위원장의 답방을 만류할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북한이 기대했던 전력지원 등 남한으로부터 얻을 것도 별로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최고 통치자의 결심에 따라 방향이 좌지우지되는 북한 사회의 특성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김 위원장이 어느날 갑자기 전략을 바꿔 서울에 가겠다고 나설 여지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북한은 김 위원장이 지난해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에서 ‘적절한 시기에 답방하겠다’고 약속한 이래 서울 답방을 부인한 적은 없다.


미국이 먼저 풀어라

김대중 대통령은 11일방한한 조지프 바이든 미 연방 상원 외교위원장 등 미 상원의원 4명에게 “남북대화가 북미관계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선 약간의 우려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우회적인 ‘불만’을 피력했다.

김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부시 행정부에 북한의 반발을 감안해보다 유연한 대북 정책을 촉구한 것으로도 해석됐다.

전문가들도 김 위원장 서울 답방 등 일련의 남북 문제를 풀기 위해선 미국의 대북 태도를 돌려놓아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이 북러 공동선언에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포함시키는 등 미국과의 게임에 주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면서 “이런 때일수록 남북 대화를 적극 추진, 미국의 북한 위협론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10월말 대화 돌파구 가능성

북한이 미국을 의식하는 만큼, 9월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의 방북과 10월 부시 미 대통령의 방한이 주목된다.

江 주석의 방북은 북ㆍ러 정상회담 처럼 북한의 동맹외교 강화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그러나 江 주석이 북미 관계의 중재 역할을 자임할 가능성이 높고, 김 위원장에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가시적인 제안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김 대통령은 10월20일 중국 상하이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담에 앞서 열릴 부시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집착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전략 포기와 관련해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 낼 생각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중 및 한미정상회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도출한다면 10월말께 남북 대화의 돌파구가 열리고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준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8/22 19:16


이동준 정치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