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탄신 500주년 '선비문화축제'

부패한 사회를 일깨우는 선비정신

“배운 게 병이 되어 세상에 나갔지…(중략)…천박한 이몸 맑은 물에 씻어 버리자.” 고결한 산림처사의 기개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 독야청청, 오로지 선비로서 살았던 사람. 스스로가 곧 정신이었던 사람.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 선생이 살아 온다. 탄신 500주년.

휘황한 이 글로벌 시대, 끝내 산림처사이기를 고집했던 그는 현재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자신의 탄생을 기리는 후손의 잇단 행사마저도 헛기침으로 일갈하지 않을까.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역사극 ‘시골 선비 조남명’은 대스승을 기리는 긴 행렬 가운데 유별난 풍경이다.

우리 문화의 전위를 자처해 왔던 연극인 이윤택씨는 일견 과거 도피로 비칠 수도 있을 자신의 21세기 제1호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언어의 진지성을 무시한 채 한낱 의사 소통의 도구로서만 취급하고 있는 디지털 시대, 말의 회복을 위한 저항을 해야 한다”고. 남명은 그렇다면 이 물질 문명의 시대, 인간성 회복의 단초라는 말이다.


진정한 선비의 표상, 추모열기 가열

남명은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렇듯 전위적 해체주의자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욕망에 내맡겨진 우리 시대, 그 연극은 사라져간 정신적 주춧돌을 열망하는 커다란 물결을 상징한다. 공맹의 가르침을 초월, 세상속의 진리를 찾아 불가(佛家)까지도 포용한 남명에 대한 관심은 올들어 부쩍 감지돼 왔다.

남명 탄신 500주년 기념사업회를 주축으로,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ㆍ경상대 남명학연구소ㆍ남명학부산연구원, 남명학회 등이 학술대회와 생가 순례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선비 문화 축제’.

경남 산청, 진주, 김해, 합천등 선생의 탄생지와 활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모의 열기에 성하가 무색하다. 선비란 무엇인가? 남명은 왜 진정한 선비, 올곧은 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나? 지금 그 답이 있다.

산청군은 국비 18억원의 예산을 책정, 남명 교육관과 동상 건립, 기념 연극 공연 등을 준비중이다. 또 합천군은 서원 건립(6억), 생가 복원(4억) 등 기념 사업으로 운을 맞춘 상태. 남명제(18일)를 전후한 기념 행사가 줄을 잇는다.

13~17일 경남 문화예술회관에서 남명문집을 소재로 한 서예전시회가, 16~17일은 산청 삼성연구소에서 ‘남명학과 21세기 유교 부흥 운동 전개’를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은 17일 오후 6시 산청군 시천면에서 열렸다. 이어 18일 오전에는 시천면 덕천서원(德川書院) 숭덕사에서 유림과 학자,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탄신 추모제가 성대히 봉행됐다.남명 일대기 영상물도 상영됐다.


한국유학사상사에 남긴 개성적 자취

남명은 그렇다면 왜 역사의 뒤안길로 파묻혀 버렸나? 첫째, 실천을 중시한 나머지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 둘째, 정인홍을 비롯 그의 제자가 대거 참여하고 있던 북인파가 인조반정이후 몰락해 학맥이 끊어졌다는 것. 그의 삶은 불우한 야인의 전형이다. 그러나 큰 인물은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

지난 2월 23일 서울대 교수회관은 남명학회 창립을 목도했다. 이날 서울대 철학과 교수 이남영 회장은 “남명의 사상은 퇴계(이론), 율곡(정치ㆍ교육), 다산(경세치용) 정도만 알려져 있는 한국 유학 사상사에서 매우 개성적 자취를 보여준다”며 “입신양명이라는 개인적 명분보다, 부패한 관료 사회와 타협할 수 없다는 의기의 선비”라고 기렸다.

그는 또 “논어를 읽을 줄 알아도 논어를 알지는 못 한다는 속담이 은유하는 바, 위선적 지식인의 폐해 또한 남명의 적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사상적 특질은 퇴계의 성리학과 대비할 때 선명히 드러난다. 고려대 이동환교수는 ‘퇴계학파는 존재론, 남명학파는 실존철학적 성격’으로 각각 대비했다. 일상적 삶 안에서 이(理)의 세계를 추구했던 관념론적 퇴계학파와는 달리, 남명학파는 철저히 현상계내에서의 구체적 체험을 중시했다.

율곡은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온전히 지킨 이는 남명 뿐”이라 했다. ‘구차하게 따르지도 않고, 구차하게 침묵하지도않았던’ 남명에 대해 우암 송시열은 “나약한 선비를 용기있게, 탐악한 관리를 청렴하게 하였다”고 평가했다.


‘단성소’는 지식인사회 향한 일갈

‘대비는 궁안에 갇힌 과부에 지나지 못 하고 임금은 어려서 제대로 정치를 펼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민심은 엉망이고 나라의 기둥은 벌레가 먹어서 바람에 넘어질 것 같고 군주는 민심을 수습하지 못 하며 벼슬아치들은 주색잡기에 바쁘고 외세는 이런 우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명문 단성소(丹城疏) 는 어느 시대라 할 것 없이 교언만이 난무하기 일쑤인 지식인 사회에 대한 일갈이다. 이어지는 말에는 서슬이 시퍼렇다.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적질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명종이 단성현감 벼슬을 내리자, 그가 부름을 물리치며 왕에게 올렸던 직언, 아니 극간이다.

당시 조정 대신은 물론, 글을 접한 일반 사림까지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 했다는 ‘불온 문서’다. 남명의 행동은 유학뿐 아니라 노장사상과 불교에도 개방적이었던 활달한 학풍, 이론적 천착보다는 이념의 실천을 중시했던 결연함 때문이었다.

직언의 상소를 올릴 때, 그는 스스로 사약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지성인이란 항상 정권을 초월해야 한다’는 신념의 귀결이었다.

남명에게 왕권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먼저 백성(民)이 있어야 나라(國)가 있고 나라(國)가 있어야 임금(君)이 있다는, 어찌보면 실로 ‘급진적’인 논리였다.

중종, 명종, 선조 등 세 임금에 걸쳐 무려 열두번이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물리치고 산림처사의 길을 표표히 지켰던 남명.

허권수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남명학 연구소 소장)은 최근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를 발간, 남명의 사상ㆍ학문에 대한 첫 평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남명의 삶과 사상에 대한 철저한 고증은 물론, 옛 풍속과 제조 등 전통 문화를 총체적으로 복원한 이 책은 16세기 유림 사회라는 한국적 엘리트 집단의 원형이 담겨 있다.

극중 남명이 읊는 싯구는 이 시대사람의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다. “세상 저잣거리에 맑은 물을 옮겨다 놓고, 내 마음 명경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아닌게 아니라, 그의 사상과 삶은 이렇게 세월을 한참 격해 새삼 빛을 발하고 있다.

장병욱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8/23 13:42


장병욱 주간한국부 aj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