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와 길흉화복] 묘자리에 얽힌 일화


■신숭겸 장군 묘

강원 춘성군 서면 방동리에 있는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은 강원도 지방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918년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한 신숭겸은 927년 대구 근교인 팔공산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전투중 포위를 당하자 왕건을 피신시키기위해 자신이 어거에 올라 싸우다가 장열히 전사했다.

왕건은 전투가 끝난뒤 그의 시신을 찾았으나 후백제군이 머리를 잘라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금으로 얼굴형상을 만들어 붙여 안장했다.

평산 신씨의 시조인 장절공의 묘가 있는 곳은 산의 웅장함이나 물의 기세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 포옹하는 듯하고 산의 모양들이 귀하고 안정된 형세를 갖추고 있다. 장절공의 묘소는 비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격으로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바람을 많이 받는 곳에 자리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산의 배면(背面)을 잘못 본 듯하다. 배면은 유정(有情)한 쪽이 면(面)이 되고, 무정(無情)한 쪽이 배(背)가 된다. 면쪽은 잘 정돈되고 밝고 아름다워 사람이 얼굴을 돌려 반기는 것 같으나, 배쪽은 깨지고 거칠어 사람이 등을 돌려 멀리하려는 것과 같다.

뒤가 되면 바람을 많이 받으니 산의 정기가 흩어지고 땅의 기운도 약하다. 또 묘소 아래에서 지세를 보면 내청룡은 길게 뻗어 나갔으나 개미의 허리처럼 4마디로 되어 이어져 나가 자손의 번창이 약한 편이다.

내백호도 짧아 부(富)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좌향(坐向: 무덤 방향을 좌라 하고 무덤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을 향이라고 한다)을 보면 내청룡을 자르고 외청룡 또한 잘려져 나갔다. 좌향에 좀더 심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큰 이유다.

왕건은 장절공의 묘가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봉분을 3개 만들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묘역 관리인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도둑이 들었다고 말했다. 관리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잠들었는데 노인이 다시 나타나 같은 말을 했다. 관리인은 노인이 3번째 나타났을 때에야 이상히 여겨 묘소로 가보니 도굴꾼 3명이 도굴을 하고 있었다. 도굴꾼들은 관리인이 나타나자 놀라 달아났고 묘소도 무사했다.

왕을 살리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장절공의 충성심은 후손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강민철장군 묘

충남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에 있는 강민첨 장군의 묘에 얽힌 일화는 또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진양 강씨로 문과에 급제했던 강민첨 장군은 고려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의 부장(副將)으로 거란족을 물리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려 병부상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명장의 묘이면 명당에 자리를 잡았을 것인데 후손들이 조상의 묘를 잊어 버렸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경위는 다음과 같다. 고려가 망하면서 많은 고려의 충신들이 이성계와 그를 따른 사람들을 변절자라 하여 왕래를 끊었고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등 많은 핍박을 당했다. 무관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했다.

강 장군의 후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했기에 조상의 산소를 보살필 여유가 없었다. 후손들은 많은 세월이 흐른뒤 벼슬길에도 오르게 되자 예산현에 있다고 선대들로부터 들어온 강 장군의 묘를 찾아 나섰다.

대략의 위치는 알았으나 그 땅은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봉분을 없애고 석물은 땅 속에 묻었으니 정확한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후손들이 한양과 예산을 오가며 수소문했으나 땅 주인이 장군의 묘자리가 명당임을 알고 자신이 죽은 후 묻히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아무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후손들은 땅 주인의 집에 후손인 청년을 벙어리로 가장해 머슴으로 들여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날 주인이 자기들만 비를 피해 집으로 뛰어든 하인들에게 소를 빨리 끌고 오라고 호통쳤다. 하인들이 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멀뚱멀뚱하자 “강 장군 묘터에 있으니 비를 많이 맞기 전에 빨리 끌고 오라”고 말했다.

주인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강 장군의 묘터에 소를 데려다 놓았으니 주인만 소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벙어리 행세를 하던 강 장군의 후손은 그길로 한양으로 달려가 어른들에게 알려 묘를 되찾았다.

후손들은 봉분을 다시 만들고 묘를 정성스레 가꾸었다. 이 일화는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상의 묘를 찾아 모시려는 진양 강씨의 후손들의 마음자세는 요즘 세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천 정판문 대자연풍수지리원 원장

입력시간 2001/08/2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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