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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대란] "풍년이 두렵다"

[쌀대란] "풍년이 두렵다"

만성적 공급과잉, 소비량 급감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식량 걱정이 해결돼야 인심 쓸 여유도 생긴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쌀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한 해 농사가 풍년이면 이듬해 민심이 넉넉해졌고, 흉년이면 사람들의 마음도 메말랐을 정도로 쌀은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 말까지도 우리에겐 ‘보릿고개’라는 연례 행사가 있었다. 정부가 나서서 30% 잡곡 혼식을 장려했고, 쌀 가공 식품은 아예 만들지도 못하게 했었다. 관습적으로도 쌀을 남기거나 낭비하는 것이 죄악시 될 정도로 쌀에 대한 의미는 각별했다.

최근 들어 쌀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영농 기술 발달로 인한 장기 풍작, 무역 분쟁에 따른 외국 쌀 수입, 국민 식생활의 변화 등 안팎의 각종 요인들로 국내에서 쌀이남아 돌고 있다.

정부 보관소는 물론이고 전국의 농협 창고에는 2~3년 이상 묵은 구곡이 산더미처럼 쌓인 채 말라가고 있다. 쌀 재고 증가로 가격이 폭락 조짐을 보이면서 연쇄적으로 농협 등 수매 기관의 수지를 악화시켜 유통 기능이 마비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넘쳐 나는 쌀로 농가, 정부, 농협 등 양곡 생산ㆍ보관ㆍ유통ㆍ판매의 3대 주체들이 ‘아사’할 위기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이제 풍년이 농가에 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총생산량의 30%가 재고

80년 냉해로 외국산 쌀을 수입한 이후 81년부터 올해까지 우리 농촌은 20년간 기록적인 풍년 행진을 이어 왔다.

매년 3,600만석 수준의 안정적인 쌀 생산량을 기록, 보릿고개라는 말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장기 풍작으로 80년대 중반부터 쌀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반면 국민들의 쌀 소비량은 해가 갈수록 급격히 줄고 있다. 96년 우리 국민이 한 해 소비하는 식용 쌀 소비량은 3,317만석. 하지만 99년에는 3,153만석으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3,085만석으로 한 해 사이에 무려 7%나 감소했다.

그러다 보니 쌀 과잉 공급 상태가 매년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99년 125만석이던 쌀초과 생산량이 지난해에는 174만석으로, 올해는 218만석으로 확대 됐다.

쌀 수급에 있어 만성적인 공급 과잉현상은 쌀 재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고 있다. 96년 457만석에 불과했던 쌀 이월 재고량(양곡년도말 기준)이 99년엔 501만석, 2000년에는 무려 749만석으로 급증했다.

올해에는 약 1,118만석으로 1,000만석 대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한 해 총 생산량의 30%가 팔리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식량기구(FAO)가 권고하는 적정 재고량 17~18%의 두 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제 풍작으로 쌀을 보관할 창고 걱정까지 해야 할 지경이다. 정부와 농협의 양곡 창고에는 수확한 지 3년이나 묵은 98년산 구곡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실제로 군부대와 학교 급식에는 98년산 구곡들을 섞은 쌀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부터 수매량 대폭 축소

풍년을 걱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데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풍년이 들면 정부가 초과 생산된 양곡의 대부분을 정부 수매 형태로 사들였다.

그러나 93년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약 체결로 농가에 대한 정부 보조금 성격인 추곡 수매에 제한을 받으면서 정부 수매량이 급격히 줄어 들기 시작했다.

반면 당시 체결한 최소시장 접근물량(MMA) 협약에 따라 95년부터 매년 식용 쌀 소비량의 1~4% 정도를 외국에서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과 같은 공급 과잉 상태에서도 정부는 올해에만 약 100만석 정도의 외국 쌀을 수입해야 한다.

UR 협정 체결 이후 정부 수매의 공백을 메워주는 곳은 농협이다. 농협은 RPC(미곡종합처리장)를 통해 연간 총 쌀 수매분 중에서 정부 수매량(55%) 보다 약간 적은 45% 정도의 쌀을 사들이고 있다.

농협은 정부를 대신해 수매한 분량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에 대해서는 국고를 통해 일정 부분 보전 받는다. 95년부터 99년까지 정부 추곡 수매량은 347만석이 감소한 반면 RPC(민간 포함)가 수확기에 자체 매입한 쌀은 423만석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정부를 대신해 쌀을 수매한 농협 RPC나 민간 RPC 업자들이 더 이상 손해를 감수할 수 없어 올해부터 수매량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나섰다는 점이다. 본래 쌀은 가을 철 수확기 바로 직전인 단경기에 가장 비쌌다가 수확기가 지나면 값이 떨어진다.

농협 RPC의 경우 농민들로부터 수확기에 쌀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 놓은 뒤 이듬해 단경기 때 약간의 이윤을 붙여 판매해 왔다.

하지만 쌀이 과잉 공급 되면서 쌀 값의 계절 진폭(단경기와 수확기의 쌀 값 격차)이 대폭 줄어들어 농협 적자폭이 커진 것이다. 지난해 쌀의 계절 진폭은 평균 2.7%로 자금 조달 최저금리는 물론이고 보관비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이었다.

이 여파로 올해 민간 RPC중 6개업체가 도산했다. 농협 RPC측에 따르면 올해 6월말 가결산 결과 농협 RPC 한 개소당 평균 1억6,100만원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누적 적자가 심화되면서 민간 RPC중 6개 업체가 58억원 상당의 정부 위탁 보관 벼를 무단 인출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올 수확기 쌀값 폭락사태 올것”

올해 쌀 값이 파동 조짐을 보이면서 각계에서 잇단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 주 각 도별 미곡 주산지 농협의 조합장들로 구성된 농협농산물 수매대책위원회와 민간RPC(쌀종합처리장) 대표들은 잇단 연석회의를 갖고 범정부적 차원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들은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정부 양곡 공매 계획을 포기하고 정부 수매량을 완전 시장 격리해 과잉 공급을 막는 특단의 대책이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올해 수매를 대폭 줄이거나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올해 수확기(10~12월)에는 낮은 계절 진폭 때문에 농가의 시장 출하 물량이 대폭 늘어나 정부 수매(575만석)를 제외하고도 최소 1,620만석 정도가 시중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럴 경우 쌀 값 폭락은 불 보듯 뻔하다. 단경기에도 싼 값에 살 수 있는데 굳이 보관료까지 들여가면 전년도 수확기에 쌀을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경기도 양주 남면 농협의 경우 지난해말 사들인 정부 차액수매분(1,448톤)과 자체 매입분(4,623톤) 등 총 6,000여톤의 수매 벼 가운데 2,350톤을 팔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농협은 쌀 상태로 파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 이달 말에 벼 상태로 1,200톤을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넘길 예정이다. 그렇더라도 1,150톤이 남아 올해 수확기 수매를 대폭 줄여야 할 형편이다.

올해 들어서만 이 농협은 약 2억5,000만원 정도의 손해를 보고 있다. 이농협의 조웅래 조합장은 “아무리 농민들이 조합원인 농협이라고 하지만 내년에 쌀 값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재고를 놔두고 누가 추가 수매를 하겠는가”하고 반문하며 “정부가 수매량을 시장에 내놓지 않겠다고 공표하고 농협 RPC에 대한 자금 지원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올 수확기에는 유례 없는 쌀값 폭락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될 경우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대상은 농민들이다. 현재 쌀은 국내 전 농가의 77.9%가 재배하는 기간 작물이다. 농가 소득의 23.8%를 차지하며, 농업 소득의 절반을 넘는 50.3%라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지 않아도 농가 부채로 시름하는 판에 추곡 수매가 대폭 줄거나 쌀 값이 폭락할 경우 농민들이 받을 피해는 치명적이다.

중앙대 산업경영연구소가 발표한 ‘영곡 생산ㆍ소비ㆍ유통 구조 변화에 따른 미곡종합처리장 운영 및 양곡정책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의 올 가을 쌀 농가 예상 판매가격은 80㎏(중품) 기준으로 지난해(15만9,252원)보다 13,9% 하락한 13만1,433원~13만7,022원 사이가 될 것으로 조사됐다.

이 경우 가구당 쌀소득이 1999년 531만원보다 23%인 120만원 정도가 준 410만원 수준으로 대폭 감소한다. 79만호에 달하는 쌀 재배 농가의 소득이 약 1조원 가량 줄어 농민 경제의 주름살을 더욱깊게 만들 것이다.


2004년 2차 쌀개방에 대비해야

전문가들은 현재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며 정부측의 즉각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우선 단기 처방으로 정부의 쌀 공매 계획을 취소하고 올해 수매하는 분량도 내년까지 시장 격리시켜가격 하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한계답 휴경 ▲정부 보유 쌀의 북한 지원 ▲결식 아동과 무의탁 노인에 대한 무료 지원 ▲식용 이외의 쌀 활용 방안 모색 등 쌀 재고량을 소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병행해 대국민적인 쌀 소비 운동을 촉진하고, 장기적으로 양질미 위주로 양곡 정책 방향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UR 협정이 1차 만료되는 2004년이면 우리는 또 한차례 쌀 개방의 문을 더욱 열어 제쳐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독불장군으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쌀 문제 만큼은 다른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사안이다. 쌀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다.

농촌 경제와 식량 무기화 등 한 국가의 근본적인 존폐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다. 따라서 단순한 경제 논리나 국제 압력에 따라 좌지우지 해서는 안 된다. 식량 주권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다.


공급 과잉 상태에서도 벼재배 면적은 늘어

소비 부진과 재고 누적으로 쌀 공급과잉이 심각한 가운데도 벼 재배 면적은 계속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부에 따르면 올해 벼 재배 면적은 108만3,000㏊로 지난해에 비해 1만1,000㏊가 증가했다. 벼 재배 면적은 1992년 115만7,000㏊에서 1996년 105만㏊로 감소했으나 그 이후 계속 늘고 있다.

올해 밭벼 재배 면적은 2만7,000㏊로 지난해 보다 58%가 늘어난 데 비해 논 벼 면적은 105만6,000㏊로 716㏊ 증가에 그쳤다.

이는 현재 벼 수매 등급 판정 기준이 엄격하지 않아 농가들이 미질은 떨어지지만 재배가 편한 밭 배를 선호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 된다. 시도 별로는 전남이 6,281㏊로 가장 컸고 대전 부산 경기 강원은 감소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입력시간 2001/08/2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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