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전 북파공작원 박부서옹

"50년 恨 이제야 풀려"

15년만에 찾아온 휴식. 대한민국 대북참전연대 회장 박부서(70)옹은 요즘에서야 겨우 잠을 편하게 잔다. 채 2시간을 못자고 깨어나 뒤척이는 일도 없고, 몸도 마음도 가뿐해졌다.

50년전 대북첩보활동을 위해 북한에 파견된 북파공작원들중 사망자와 부상자 등이 국가유공자로 예우받을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 최근 들리면서부터다.

"말할 수 없이 감개무량합니다. 50년동안이나 고통과 한을 묻고 살아온 밑바닥 인생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됐습니다. 모두 주윗분들이 많이 도와주신 덕택입니다."

지난 15년간 오로지 싸움으로 점철했다. 울화통이 터져 삭발을 한 것만 두번. 젊어서는 몰랐던 데모도 10여차례. 헌병이나 경비원에게 떠밀려 문전에서 쫓겨나기도 예사였다. 와중에도 분통이 터지면 국회든 국방부든 헌법재판소든 그 자리에서 컴퓨터나 책상 등 집기까지 부수기도 했다.

'악당' '막가파'란 별명은 오래전부터 굳었다. 요즘도 설악산 대청봉을 거뜬하게 오를 만큼 원래 근력을 타고 났지만, 분노와 억울함의 폭발력이 박옹을 더 거세게 만들었다.


HID 1기생, 한국의 이념전쟁이 낳은 희생자

그는 6ㆍ25전쟁후부터 1972년 남북간 협정이 맺어질때까지 활동한 북파공작원 1만여명중 한 사람이다.

황해도 은율이 고향이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 아래 4남매중 장남으로 고2때 6ㆍ25전쟁을 맞아 1ㆍ4후퇴때 떠나왔다. 피난길에 놓쳐버린 부모님과 형제는 지금까지도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 전쟁 고아가 되면서 곧바로 구월산 유격부대를 찾아갔다. 당장 먹고 잠잘 곳을 얻기 위해서였다.

서울 정릉동 청수장에서 3개월간 특수훈련을 받았다. 사격술과 독도법, 탈출요령, 폭탄조작법 등 워낙 훈련의 강도가 높아 도중에 다치거나 장애를 입는 대원도 있었다.

자신은 현역군인 신분도 아니며 곧 대북첩보활동을 위해 북파공작원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안 것은 교육이 끝난지 한달쯤 지나서였다. 육군첩보부대 (HID) 제1교육대 1기생. 한국의 이념전쟁이 낳은 제물이었다.

1952년부터 2년간 북파공작원으로 사지(死地)에 던져졌다. 한번 침투때마다 투입되는 대원은 10명 안팎. 배를 이용해 몰래 북한으로 침투한 뒤 현지의 인민군 등을 나포하는 것이 임무였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확률이 희박했다. 식량은 물론 의료, 통신, 수송, 실탄 등 아무런 지원도 없었다. 독전(獨戰)중에서도 가장 살벌한 독전.

행여 인민군에게 발각될 새라 잠도 큰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거의 뜬 눈으로 지샜다. 먹을 것이라곤 처음 가지고 들어간 약간의 미숫가루, 건빵이 전부. 그것이 바닥나면 한밤중 인근 민가에 숨어들어가 밥을 훔쳐먹거나 솔잎 등을 먹고 버텼다. 등 뒤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하는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도 숱하게 지켜보았다.

"임무가 끝나고 귀환하는 배를 타기로 약속된 곳에 가보면 함께 떠났던 대원들 중 살아돌아온 사람이 저까지 포함해 한둘이 될까 말까, 그때마다 '또 갔구나'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다행히 내 목숨은 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해, 올때마다 다음엔 다시 가지말아야지 결심하지만,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저녁이되어 '누구 누구 나와라' 호명하는 것을 보면 늘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습니다. 심지어 부상자까지도 다친 곳이 나으면 다시 북으로 침투시키는 상황이었습니다. "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교전중 배에 총상을 입고도 10리길이나 내달려'독종'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도 박옹의 배엔 그 흉터가 또렷이 남아있다. 그 얼마되지 않는 생존자 가운데 포함된 건 천운이었다.

1954년에 제대, 정확히 말하면 제대가 아니라 '해고'였다. 북파공작원자체를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기때문이다. 나오기전 '절대 북파공작활동 사실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다짐을 한 뒤 사회에 나왔다. 철저히 외면당하지만 않았어도 평생 가슴속에만 묻었을 비밀이었다.

그나마 박옹은 앞길을 잘 개척한 케이스였다. 제대후 신문배달 등을 하며 고학해 고등학교를 마쳤고, HID에서 군복무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 관계로 다시 육군에 입대, 군생활을 반복했다.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그는1961년 결혼과 함께 서서히 안정을 찾아 1997년 건설협회 기획부장으로 은퇴하기까지 평생 건설업계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세월 갈수록 속았다는 생각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속았다는 생각에 울분을 감출수 없었습니다. 목숨 건 희생만 강요했을뿐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아예 존재 자체조차 부정하며 끝내 감추고 기만하기만 했습니다.

우린 군번도, 계급도, 훈장도, 보상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부상자들 조차 상이용사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몇해전 김훈중위 사망사건땐 단 한 사람이 죽은 문제로도 온 나라가 매달려 진상조사를 벌이며 떠들썩했지만, 다른 곳도 아닌 적진 속에 직접 뛰어들어 희생된 우리 수천, 수만명의 목숨은 왜 돌보지 않는 겁니까. 대한민국이 법치국가, 민주국가라구요? 천만에요. 제가 15년간 뛰어다니면서 경험한 바로는 전혀 아니올시다 였습니다. "

1987년 국군의 날, 처음으로 '당시 참여대원들의 인적사항만이라도 알게해달라'고 육군참문총장 앞으로 진정서를 냈다.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럴것이 그것을 알려주는 자체가 공식적으로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박옹이 벌인 싸움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현충일, 직접 모조지 전지 100장에 글을 쓰고 벽보로 붙이며 전우를 찾아나섰다. 그날 바로 6명의 전우와 상봉했다. 무사히 살아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시며 부둥켜 안고 울었다.

"휴전되기전까지 HID는 3기에 걸쳐 약 800여명이 북파공작원으로 활동했는데 그중 생존자는 30여명밖에 안됩니다. 다른 공ㆍ해군 첩보대까지 치면 1만여명중 1,000명 정도만 남아있습니다.

북파공작원들에겐 유가족이란 것도 없습니다. 총각때 전사했기 때문에 처자식도 없고, 부모님마저 그 사이 다 돌아가셨거든요. 살아남은 사람들도 부상자의 경우 상이용사로서의 의료혜택조차 못받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은 물론, 한편에선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많습니다.

공작활동때 벌어진 끔찍한 기억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첩보대 출신들은 하나같이 폭주(暴酒)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지금 이 나이에 소주 5병을 마십니다. 완전히 취해서야 그 고통을 좀 잊는 겁니다. "

국방부에 드나들기만 100여회, 정보사령부는 50번이 넘게 드나들었고, 헌법재판소도 뻔질나게 찾아갔다.

감사원,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호소할 수 있는 모든 관련기관에 수시로 진정서를 내고 진상조사를 건의했지만 대부분 묵살됐다. 직장 휴가때엔 전우의 무덤찾기에 나섰다. 1990년대 초 마침내 백령도 지뢰밭에서 전사자의 무덤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때까지 전사자의 군적 자체를 부인하던 국방부에 입증증거로 제시해 당당히 국립묘지에 이장시켰다.

수많은 건의와 진정 등 공문싸움끝에 1994년 언론에 처음 알려지면서 큰파장을 일으켰다. 방송에 나간 당일 밤엔 새벽 1시반부터 두시간동안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걸려오는 협박전화에 시달려 힘든 밤을 보냈다.

'죽이겠다' '폭파하겠다' '묻어 버리겠다'등 차마 입에 담지못할 험악한 공갈들이었다. 이후에도 귀가 닳도록 들은 협박이다. 한편에선 격려전화도 많았다.

1996년엔 국방부 앞에서 맨처음 데모라는 것도 해보았고 1997년 대선무렵엔 김대중 후보와 함께 한 '한국정책발전 연구원' 조찬회에서 기습적으로 질의를 던져 보상에 대한 약속을 받기도 했다. 1주일전부터 원고를 만들어 입이 닳도록 외고 왼 뒤 준비해간 '기습무기'였다.


정부와의 보상투쟁서 높고 두터운 벽 실감

그러나 벽은 한없이 두껍고 높았다. 1998년 국회에 요구한 진상조사와 보상에 대한 청문회 건의도, 서울지방검찰청과 고법, 대법으로 이어진 입법, 사법, 행정부 고발도 기각됐다.

1999년 헌법소원까지 냈지만 '북파공작원에 대한 법 자체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기각됐다. 비까지 내리던 날, 또한번 울분이 터져 헌법재판소 현관 앞 여신상을 우산대로 두드리고 발로 차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국내에 유명하다는 변호사란 변호사마다 다 찾아다녔지만 '승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직접 '군형법해설집', '헌법해설집'등을 독파하며 공부했다. 초창기 '군번없는 첩보부대전우회'에서부터 지난 3월 대북참전연대를 결성하기까지 다섯번이나 단체를 만들고 이끌어왔지만 그 운영비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충당했다.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월급을 받으면 100만원만 아내에게 떼어준 뒤 나머지는 모두 활동비로 쏟아부었다. 연월차 수당은 물론 보너스도, 신용카드도 밖으로 새나갔다.

워낙 악명높은 '행동파'라 공무원들에겐 진작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국민고충처리 위원회에서 건의가 묵살됐을땐 그것에 또 화가 나 '국민고충처리발전연구소'란 이름으로 간판을 만들어 등산때마다 등에 매고 다녔다. '고충처리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나름의 시위였다. '미친 할아버지'라며 웃는 사람들도 두렵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 공론화되면서부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회원들의 결집은 더강해졌고, 끄떡않던 국방부의 벽도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국정감사에까지 이 문제를 올려놓은 민주당 김성호 의원은 그가 가장 감사해하는 주인공. 기나긴 약자들의 싸움이 비로소 결말을 보게 되었다.

보도된 바와 같이 국가보훈처에선 내년부터 북파공작원 사망자 유족에게 일시보상금 1억원, 매달 67만원 가량의 연금을 지급하는 것을 비롯해 상이자와 행방불명자에 대해 일련의 보상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상처받은 무명영웅의 염원 풀어줘야”

"사실상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너무나 힘들었고, 그동안 치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봐야 지난날 대북첩보전때 치른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우리 대북첩보대원들의 보상과 명예회복문제가 제대로 자리잡을때까지 끝까지 싸울 생각입니다.

지금도 법안이 완전 통과가 될때까진 일단 지켜보다가,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엔 전보다 더 한 일이라도 벌일 각오가 돼 있습니다. "

박옹의 할 일은 앞으로가 더 많다. HID외에도 공군첩보대 OSI, 해군첩보대 UDU 출신들도 동병상련의 고통을 안고 있다.

UDU의 경우엔 존재여부를 공개한 것도 작년이 처음. 상처받은 수많은 무명의 영웅들이 그의 행보를절박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토록 '배은망덕'한 국가이지만, 오늘도 박옹의 집엔 태극기가 휘날린다. 365일 평생 연중무휴로 국기를 게양해 온 사람이다. 믿음을 저버린 애인마저 끝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청년처럼, 무심한 서울 하늘 아래 그의 깃발이 펄럭인다.

입력시간 2001/08/30 14:3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