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P 파경위기'

林 장관문제로 공조 붕괴, 정국 구도 '회오리'예상

김대중 대통령과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간의 ‘DJP공조’가 15대 총선 직후인 1996년 5월 첫 공조를 맺은 이래 5년4개월만에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문제를 놓고 최대의 파경위기를 맞고 있다.

◁ 결연한 DJ와 JP. 정치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을 실증시켜주고 있다.<이종철·왕태석/사진부 기자>

김 대통령은 자민련과의 공조가 붕괴되는 한이 있더라도 임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원칙에 따라 당당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다는 배수진 전략을 치고 있다. DJP공조를 유지하기 위해 대북화해협력 정책의 포기나 후퇴로 인식될 수있는 임 장관 사퇴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이 사실상 자민련과의 결별까지 각오하고 임 장관 문제에 임하는 것은 이 문제가 민족의앞날을 좌우하는 중대한 기로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이 문제를 국내 정치적 관점에서 보지않고 민족과 미래, 국제관계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면서“민족의 장래가 걸린 이런 문제를 어떻게 대통령으로서 방치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특히 청와대가 임 장관 문제는 햇볕정책에 관한 문제요, DJP공조의 근간에 해당한 점을 분명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김 명예총재가 장관의 국정원장 시절 행적까지 들먹이며 사퇴를 요구한 데 대해 김 대통령은 전에 없이 서운해했다는 후문이다.

한 관계자는 “서운함이 중첩되면서 김 대통령은 ‘이제는 공조에 금이 가더라도 원칙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고 말했다.

향후 국정운영에서 소수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원칙대로 국정을 운영할 때 잃어버렸던 20~30대의 지지를 되찾고 회생할 길도 생길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DJ·JP "더 이상 양보없다" 결연

김종필 명예총재 역시 “표결까지 가게 돼 안타깝다”며 이미 DJP공조 파기를 불사한 듯한 자세다.

특히 9월 1일 자민련 의원총회에서 JP는 이틀전 연찬회때와 마찬가지로 격앙된 어조로 여권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는 “자민련은 그동안 못 참을 것도 참으며 공조차원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며“이제 우리도 모든 걸 정비할 때가 왔으며, 우리가 챙겨야 할 것 챙기고 적당히 질질 끌려다닌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JP가 이처럼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겨낭해 승부수를 던진 것은 그동안 안보문제에 대해 누적돼온 불만과 우려가 이번 임 장관 사퇴문제를 계기로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라는 게 자민련측 분석이다.

하지만 JP발언의 이면에는 정부의대북정책에 대해 제 목소리를 분명히 할수록 내년 대선을 맞아 보수층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활동영역을 한층 넓힐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자민련의 한 의원은 “대북ㆍ안보문제를 놓고 JP의 보수적 신념은 흥정이 될수 없다는 점을 각인시켜 안정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민련 일각에서는 DJ에 대한 JP의 서운한 감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공동정부의 오너중 한 사람으로서 장관 한 사람의 경질을 요구하는데 그것 하나 못들어주느냐는 불만이 내재돼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DJP는 임 장관 문제로 끝내 갈라설 것인가. 과거 두 사람의 인연을 살펴보면 대체로 짐작이 가능하다.

‘정치 9단’이라는 소리를 듣는 DJP는 61년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쿠데타 시절부터 한 사람은 민주화세력의 한 축으로, 또 한사람은 근대화와 개발독재세력의 한 축을 차지하며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 경쟁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공조에 나선 것은 96년5월부터다. 당시 JP는 95년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90년 3당합당 이후 5년간 손을 잡아왔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 자민련을 결성한 후 충청도에서 이른바 ‘핫바지론’을 펴며 지역정서를 자극해 지방선거에서 승리했고,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96년 4월 총선에서 충청표를 싹쓸이하다시피해 50석을 얻은 상태였다.


양당 공조 '파기' '복원' 거듭

하지만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여당의 총선 패배로 제1, 2 야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의원 빼가기를 정략적으로 시도하자 두 사람은 생존을 위해 국회에서 단독회동하면서 첫 공조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지난 7월9일까지 겉으로 드러난 ‘DJP 회동’만JP가 총리 자격으로 대통령과 수시로 만났던 것을 제외하고 12차례에 달할 만큼 두 사람은 정치적 고비 때마다 회동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과시해왔다.

DJP회동의 대표적인 사례는 97년11월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 99년7월17일 워커일 합당 논의, 같은해 7월21일 내각제 개헌유보 합의, 12월 공동여당 합당불가 확인, 지난 1월 공조 복원 선언 등이다.

특히 JP는 97년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 DJ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대가로 국민의 정부 들어 총리(3명)와 장관직(14명) 지분권을 행사하며 공동정부의 단맛을 톡톡히 봤다.

이 과정에서 JP는 2000년4·13 총선과정을 앞두고 다시 ‘마이 웨이’를 시작하기 전까지 DJ에 대해 깍듯이 예우를 해왔다.

이러한 JP에 대해 DJ는 내각제 발언으로 JP의 분노를 산김영배 국민회의 총재권한 대행이나 설 훈 기조위원장을 즉각 교체하는 성의를 보였고, 한때 JP를 거스르면 당직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JP는 지난해 4ㆍ13 총선을 앞두고 연대를 제의한 DJ의 손을 뿌리친 채 “더이상 공조는 없다”며 또다시 독자후보를 냈다가 17석을 얻는데 그쳐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에도 못미치는 참담한실패를 맛봐야 했다.

JP는 총선 패배 이후 자택에서 장기칩거하면서 골프로 심신을 달래왔으나, DJ는 지난해 12월과 올 1월 정치적 곤경에 몰린 그에게 민주당 의원 4명을 이적시켜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는 배려를 베풀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지난 1월 다시 회동을 갖고 양당간 공조체제의 복원을 공식 선언하면서 DJ의 임기말까지 공조할것을 다짐했다.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지난 4월에 민국당까지 포함하는 3당 정책연합 성사로 발전, 원내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JP는 그동안에도 국가보안법 개정 등 자민련의 보수색채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독자목소리를 내왔으며, 이번에는 8ㆍ15 통일축전 방북단 파문으로 임 장관 문책 논란이 대두되자 자진사퇴를 요구하며 곤경에 처한 DJ에 등을 돌린 것이다.

결국 지난 5년간의 DJP 공조관계를 보면 ‘정치에는 영원한 동지도,적도 없다’는 말이 실증된 셈이다.


'큰 틀 공조'이어져도 신뢰할 수 없는 관계로

정치권 주변에서는 이번 임 장관 해임안 가결로 DJP공조를 바탕으로 한 2여공동정부가 와해될 가능성이 크며 DJP도 결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가결후 자민련 이적파 의원들의 반발 탈당이나 원대복귀 등 해임안 표결 후유증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공조파기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표결 후에도 전격적인 DJP 회동을 통해 ‘큰틀의 공조’ 원칙을 재확인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나, DJP관계는 이미 신뢰보다는 언제든 돌아설수 있다는 불신으로 크게 훼손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정철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9/04 19:43


박정철 정치부 jc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