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인창고의 '봉황 드라마'

무명이 쿠데타…창단 2년만에 전국대회 준우승

그것은 기적이었다. 지난해 3월 창단, 1, 2학년생 23명으로 구성된 신생 팀. 전국대회에 세 차례 출전, 두 차례는 1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약체팀.

청소년대표 선발과도 전혀 무관할 만큼 스타 한 명도 없는 무명팀. 이런 구리 인창고가 제3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한국일보 일간스포츠 대한야구협회 공동주최)에서 준우승에 오른 것은 분명 기적이었다.


18일 간 계속된 ‘파란’

봉황대기 개막전이 열렸던 지난달 10일 서울 동대문 야구장. 5회 2사후 타석에 들어선 구리 인창고 4번 타자 박민철은 장충고 구원투수 선우준원의 4구를 통타, 전광판 바로 아래를 맞혔다.

115㎙짜리 솔로 홈런. 인창고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전국대회 첫 승을 건지는 순간이자 올 고교야구계 최대 화제가 되어버린 ‘인창고 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지만, 당시로선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인창고가 강호 장충고를 봉황대기 개막전에서 7_0 7회 콜드게임으로 대파했을 때만해도 야구계에선 학생 야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변’ 정도로 넘기는 분위기였다.

예선전을 치르지 않는 대회 특성 때문에 수 차례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쟁쟁한 강호들이 모두 출전한 봉황대기여서 무명 인창고가 파란을 이어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창고는 2회전서 성인고와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는 접전을 벌인 끝에 11_9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6강 고지에 오르며 인창고 이변이 ‘찾잔 속의 태풍’이 아님을 과시했다.

물론 2회전에 쉽게 오른 것은 아니었다. 1회초 1점을 내줬다가 1회말 박민철의 투런 홈런으로 단숨에 승부를 뒤집었던 인창고는 8회 9_8로 몰렸지만, 9회말 윤석민의 극적인 끝내기 3점 홈런으로 16강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올 대붕기 우승팀인 마산 용마고(구 마산상고), 화랑기 우승팀 경남고 등 강호들이 모두 나가 떨어졌던 16강전서 인창고는 다시한번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지난달 23일 열린 16강전서 봉황대기를 두 차례나 석권했던 신일고와 만났지만, 장단 19안타를 몰아치는 막강화력을 과시하며 올 시즌 고교야구에서 한 팀이 올린 최다 득점인 무려 20점을 뽑아내며 신일고에게 7회 콜드게임의 수모를 안겼다.

신일고와의 격전을 승리로 끝낸 후 인창고 코칭스태프는 “우리가 신일고를 꺾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감격스러워 하며 스스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인창고는 봉황대기 소개책자에 수록된 출사표에 “큰 성적을 기대하기 보다는 경험을 쌓아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면서 “목표를 8강 정도로 잡고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고 밝혔다.

이후 인창고는 스스로 이번 대회 최대 목표로 삼았던 8강전서 고교 야구 최강자로 군림해온 성남고를 7_5로 제압했고, 4강전서야구 명문 서울고를 6_3으로 누르는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염을 토했다.

흥미로운 것은 인창고가 준결승까지 치른 5경기 중 4경기서 역전 홈런포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 그만큼 극적인 승부를 연출했다는 이야기다.

8월 27일 벌어진 결승전서 창단 7년째로 이번 대회 또 다른 돌풍의 주역 청주기공고에 15_2로 대패하면서 ‘고교 야구의 외인부대’ 인창고의 18일 간에 걸친 이변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고교야구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봉황대기서 역전 홈런포를 쏘아 올리는 못 말리는 승부근성으로 준우승을 차지한 인창고는어느 누구도 신생팀이라고 얕보지 못할 만큼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결코 이변은 아니었다”

“절대 이변이 아닙니다. 승부의 세계에서 원인 없는 결과가 있겠습니까. 예상보다 빠른 성과이긴 하지만, 어린 선수들이 밤늦도록 운동장에 남아 땀을 흘렸던 당연한 결과인데 왜 자꾸 언론에서 이변이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인창고 김진욱 감독은 준우승한데 대해 ‘이변’, ‘기적’ 등으로 표현하는 언론보도에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렇다. 인창고의 갑작스러운 부상에 대해 대부분 언론에선 ‘이변’, ‘파란’ 등으로 보도했지만, 고교 야구계 내부에선 이미 예고됐던 반란이었다는 후문이다.

대한야구협회 김용균 기록과장은 “인창고 선수들 대부분이 1996년부터 구리시 리틀야구단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다져온 선수들”이라며 “그만큼 무서운 잠재력을 갖고 있어 언젠가 한번 ‘사고’를 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인창고는 96년 3월 경기 구리시 인창지구에 문을 연 신설학교. 야구팀은 지난해 3월 박영순 구리시장 등 지역 인사들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만들어졌다.

올해 경기도내 각종 예선전에서는 7승2패의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전국대회에는 올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 출전, 모두 1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인창고 창단 사령탑을 맡은 김진욱 감독의 남다른 열성과 구리시 리틀야구단에서 차곡차곡 기본기를 닦았던 선수들의 야구에 대한 욕심이 만나자 어느새 ‘내공’이 쌓여갔다.

방학 때마다 합숙 훈련을 마다하지 않는 열정을 지닌 인창고 야구팀 가운데 7명은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개설했던 야구 클리닉에 개인적으로 참여할 만큼 야구 욕심이 많다.

특히 사이드암 투수로 OB와 쌍방울을 거치며 프로 무대에서 10년간 활약했던 김진욱 감독은 ‘스스로 생각하는 야구’를 강조하며 어린 제자들이 게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도록 기본기를 닦는 데 주력했다.

김 감독은 “이제 우리 선수들은 상대를 보면서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점수가 몇 점인지, 언제 팀 배팅을 하고 언제 풀 스윙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비록 둔치에 있는 야구장이지만, 고교 야구팀으로선 보기 드물게 연습구장과 기숙사를 갖추고 있는데다, 구리시에서 매년 5,000만원의 운영비를 지원해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것도 급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박영순 구리시장은 “구리시를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도시로 만들겠다”면서 야구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리틀야구단 시절부터 닦아온 탄탄한 기본기, 전용구장과 기숙사 등 남다른 지원, 프로 출신 사령탑의 체계적인 훈련.

봉황대기 준우승을 차지했던 인창고 이변은 결코 ‘무명의 반란’이 아니었다. 정상을 차지하겠다는 일념 아래 똘똘 뭉쳐 남몰래 흘려온 땀의 결과이다. 고교 야구 태풍의 눈으로 등장한 인창고가 내년 시즌 고교야구에서 어떤 활약을 할 지 주목된다.

박천호 체육부기자

입력시간 2001/09/04 20:40


박천호 체육부 tot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