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이 땅에서 여성감독으로 사는 법

영화만큼 여성들이 활개치는 분야는 없다. 왜 그럴까. 여성들이 문화적 예술적 감각이 탁월해서? 아니면 영화는 여성의 시각으로 봐야 그 흥행성 여부를 알 수 있어서? 여성관객이 많으니까 여성이 영화를 만들면 좋아서? 아니면 우리나라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워낙 어렵고 다양하지 못해서?

지금 영화에 여성 파워는 비극적이게도 열악한 사회환경의 산물이다. 내로라는 제작자, 기획자, 홍보마케팅 담당자들이 모두 그렇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들어간 영화사나 극장 기획실, 그곳에서 배를 골며 버티면서 배운 기획과 제작의 노하우, 영화를 보는 눈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었다.

먼저 명필름 심재명 대표. 1986년부터 합동영화사에서 일했다. 한번도 영화일을 떠난적이 없는 그는 90년대 “영화도 기획과 마케팅이다”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독립했고, 그 후 영화사를 설립해 ‘조용한 가족’ ‘접속’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로 한국 최고의 제작자가 됐다.

‘주유소습격사건’ ‘선물’ ‘신라의 달밤’의 좋은 영화사 김미희 대표 역시 알다시피 화천공사기획실 출신이다.

‘노랑머리’ ‘파란대문’ ‘노랑머리2’의 유시네마 유희숙 대표도 영화홍보로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야 지금의 제작자가 됐다.

시네마서비스 지미향 이사도 그렇고, 여성영화인회의를 이끄는 홍보사 올댓시네마 채윤희, 홍보사 아트로드 대표 김혜원도 같은 길을 길어 지금에 왔다. ‘반칙왕’의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도 늦깎이 영화인이긴 하지만 신씨네에서 기획 일을 거쳤다.

영화 기획과 홍보 마케팅에는 지금도 여성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미래의 심재명, 김미희를 꿈꾸며 영화를 보는 눈부터 시작해, 영화를 보게 하는 방법, 영화를 잘 만드는 과정을 배운다.

그리고는 프로듀서로 나선다. 성공한 여성제작자밑에는 유능한 여성 프로듀서가 있었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의 이미연, ‘미술관옆 동물원’의 이미영이 유명하다.

그 뿐 아니다. 이제 여성영화인에게 성역은 없다.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온 김윤희는 촬영감독으로 당당하게 현장을 누비고, ‘박곡지’ 하면 한국 최고의 편집기사이다. 특수분장의 1인자도 여성이고, 촬영현장에 가면 스크립터는 당연히 여성이고 무거운 조명기구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우람한 여성도 흔하다.

그러나 단 한 곳. 아직도 여성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분야가 있다. 바로 감독. 그나마 현재 감독으로 두 편 이상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단 세 명 뿐이다. 그나마 독립 다큐멘터리라는 상업성과는 처음부터 거리를 둔 ‘낮은 목소리’시리즈의 변영주 감독을 제외하면 둘 뿐이다.

1996년 ‘세친구’로 데뷔한 임순례 감독이 5년 만에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완성해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미술관옆 동물원’으로 한국여성감독으로는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정향감독이 충북 영동 산골에서 두번째 작품 ‘집으로’를 찍고 있다.

여성감독은 대부분 데뷔작 하나 내고는, 그것이 흥행과 작품성 모두 실패하면서 사라진다. ‘301, 392’의 작가 이서군도 ‘러브 러브’를 만들고는 소식이 없다.

왜 우리 여성영화인들은 유난히 감독 쪽에 약한 것일까. 충무로 텃세가 워낙 심해서? 현장에서 스태프가 여자라고 말을 안 들어서 영화가 제대로 못나오기 때문에?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그들 스스로 ‘여성’이란 의식이 너무 강했고, 그래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성이니까, 여성을 주제로 한 영화. 아니면 페미니즘을 벗어 던지지 못한 강박관념이 그들을 주저앉힌 것은 아닐까.

임순례, 변영주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세친구’는 여성영화도, 그 잘난 페미니즘영화도 아니다. 어느 영화보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날카롭게 파고들어 호평을 받았다.

그것이 임순례 감독에게 두번째 영화를 할 기회를 준 셈이다. 2001년 8월 말 또 한명의 여성감독이 탄생했다.

‘반칙왕’의 프로듀서 출신 이미연이 ‘버스, 정류장’의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과거 여성감독의 태도와 다르다. “한번도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제는 여성감독스스로 자신들의 벽을 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입력시간 2001/09/04 21:24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