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망대] '하·현·대' 악재 풀리려나

‘추청(秋晴).’ 옛 사람들은 백로를 막 지난 이 맘때를 이렇게 불렀다. 일교차가 커 대기중 먼지가 새벽녘 이슬에 맺히고, 늘 적당한 바람이 불어 남은 먼지도 멀리 실어가 일년 중 가장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가을의 초입을 맞아 거리와 들녘의 풍경과 색채, 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지만 우리 경제를 둘러싼 공기는 여전히 탁하고 습하다.

하이닉스 반도체, 현대투신, 대우자동차 등 3대 문제아들의 처리는 8월말 시한을 넘긴 후 쫓기듯해법을 찾아가는 인상이지만 양치기 소년의 상습적 거짓말에 식상한 시장은 반신반의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1930년대 공황에 버금가는 경기침체

정부관계자와 관변 연구기관들도 공공연히 ‘1930년대 공황’을 언급할 정도로 심각한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실업공포는 경기회복의 마지막 버팀대인 민간소비마저 극도로 위축시키고 있다.

‘미국발 신경제’와 ‘IT(정보통신) 유토피아’를 찬양하던 목소리는 간데없고 우울하고 불길한 만가(輓歌)만 넘친다. 일찍이 토마스 칼라일로부터 ‘음울한 과학’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야할 판이다.

신 여소야대 국회의 국정감사가 시작된 이번 주 주요 지표나 정책 발표는 없다. 하지만 구조조정 지연, 공적자금 부실 운영, 경기활성화 논란 등에 대한 추궁이 쏟아지는 만큼 정책 당국자들로선 어느 때보다 고통스런 시기이다.

안개속을 걷던 문제기업들의 처리방향이 윤곽을 드러내 그나마 위안이겠지만 헐값매각 논란 등의 칼날을 어떻게 비켜갈지 궁금하다.

우선 회생쪽으로 가닥을 잡은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채무재조정과 신규자금 지원문제가 이르면 13일 채권은행장 회의에서 결정된다.

관건인 5,000억원 규모의 신규자금 지원.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일단미국과의 통상관계 등을 고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지원에서 빠지고 대신 외환은행과 한빛은행 등이 이 몫까지 분담하는 방안이 채택될 것”이라고 말했다.

AIG에 배정할 현대증권 우선주 가격문제로 난관에 봉착했던 현대투신 매각협상은 ‘신주 발행가 7,000원, 현대증권 주주에도 우선주 배정’이라는 AIG의 수정안이 나와 돌파구를 찾게됐다.

AIG컨소시엄이 주당 7,000원에 4,000억원 규모의 현대증권 우선주를 매입, 전체 지분의 35%를 확보하되, 현대증권 주주들이 원하면 같은 가격으로 500억원 규모의 우선주를 매각한다는 것.

이 경우에도 AIG는33.1%의 지분을 확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당초 현대증권 이사회가 의결한 우선주 가격은 8,940원이어서 소액주주들의 반발은 물론 헐값매각 비판 등의 후유증이 적잖을 전망이다.

“대우차 매각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하겠다”는 이근영 금감위원장의 언급이 나온 후 ‘GM에 부평공장을 제외한 대우차를 매각하되, 부평공장을 별도 법인화해 여기서 생산된 차를 일정기간 GM에 위탁매각하는’안이 유력시되고 있다.

이 경우 매각대금은 1조원 안팎이 될 전망. 이와 관련, 채권단 관계자는 “GM은 가격조건이 어떻든 부평공장을 인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라며 “부평공장고용 및 협력업체 이익을 최대한 반영한 절충안을 일괄매각안과 함께 정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물론 부평공장 근로자와 인천시 등이 분리매각안에 강력 반발하고 있어 진통이 예상되지만“더 이상 대우차문제를 질질 끌고 갈 수 없다”는 정부의 의지로 미뤄볼 때 국정감사가 끝나는 10월초 어떤 식이든 방향이 잡힐 전망이다.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국내 악재들은 이렇듯 실마리를 찾고있으나 해외변수들은 산너머 산이다. 7월까지 4.5%에 머물던 미 실업률이 8월 0.4%나 급등한 4.9%로 나타난 게 대표적.

이는 수치상으로 1995년 이래 최고지만당시의 실업률 증가가 GM의 일시 휴업에 따른 것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1990년 이래 최고의 실업률이다.

더구나 제조업 실업자가 14만명이나 늘어나는등 제조업과 제조업관련 서비스업(교통ㆍ통신)의 실업률이 크게 높아져 경기바닥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됐다.

고용시장은 미 경제의 3분의 2를 떠받쳐온 소비의 밑바탕. 하지만 실업률 증가는 소비심리 위축으로 이어지고 이는 기업의 매출부진으로, 매출부진은 투자감소 및 대량감원으로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부시 대통령이 이례적으로“실업률 증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으며 경제문제 해결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인식에서다.

미국 기업들의 3분기 실적전망 발표 시기와 겹친 미 실업률 통계가 세계 증시의 폭락을 몰고 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스닥 지수는 다시 1600~1700대를 오가고, 다우도 9500선을 위협받는 상황이다.


미국경제지표 발표에 시장관심 집중

시장의 관심은 14일 발표되는 미국의 경제지표(8월 생산자물가지수, 8월 산업생산과 설비가동률, 9월 미시건대 소비자신뢰지수)에 집중돼 있다.

8월 실업률이 ‘교사 실업’(방학기간중 미국 교사들은 무급)에 의한 일시적 현상인지, 침체의 골이 깊어지는 경기를 반영한 것인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10월초로 예정된 미 FRB의 추가 금리인하 여부와 폭도 주목된다. 금리인하 시기가 전격적으로 앞당겨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국내 증시의 변수로는 13일부터 코스닥시장에서 매매가 시작되는 안철수 연구소의 주가 견인력. 공모에 1조원의 돈이 몰리게 한 위력이 재료부족에 허덕이는 증시에 복음을 줄 수 있을까.

이유식 경제부차장

입력시간 2001/09/1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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