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주앉은 남북 서울 답방 불씨 되살릴까

장관급회담 재개 합의, 북측 대화에 적극 자세

남북관계가 6개월 만에 기지개를 켜고있다. 15일부터 나흘간 서울에서 제5차 장관급 회담을 재개키로 합의한 데 이어, 17일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적십자사 사무총장실무회담이 열릴 공산이 커졌다.

여기에 민간 단체들은 독도영유권 확보를 위한 남북학술토론회와 평양 대박산 기슭 단군릉에서 개천절 공동행사를 갖기위한 실무접촉을 조만간 금강산에서 열기로 했다.

◁ 남북관계가 제5차 장관급회담 합의를 계기로 6개월만에 다시 활기를 띠게 됐다. 지난 3월 무산된 5차회담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원유헌/사진부 기자>

고무적인 것은 북측이 어느 때 보다 회담에 열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측은 2일 림동옥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 명의로 당국간 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선(先) 제의한 데 이어, 남측이 6일 오전 ‘장관급 회담을 갖자’고 역(逆) 제의한 지 불과 5시간 만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한다’고 답해왔다.

지금껏 당국간 회담이 ‘제의→수정제의→수정제의’를 되풀이하는 수순을 거친 점을 고려하면, 이번 합의는 ‘오전 제의, 오후 동의’로 이례적이다.


“답방문제 풀릴 것” 기대섞인 전망

더구나 북측은 화답 전화통지문에서 “회담이 6ㆍ15 북남공동선언의 정신에 부합되게 성과적으로 진행되기 바란다”고 밝혀 남측이 제시한 의제에 대해서도 사실상 동의했다.

남측은 수정제의에서 “이미 합의한 사안을 비롯해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산적한 과제들을 시급히 해결하자”고 제의, ▦경의선 연결 ▦이산가족 문제해결 ▦금강산육로관광 ▦개성공단 ▦경협4대 합의서 등 미이행 합의사항을 우선 논의할 것을 분명히 했다.

장관급 회담이 지난해 6ㆍ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정치경제 사회 등 남북간 현안 및 교류 문제를 총괄적으로 다루는 고위급 채널로 자리잡은 점을 감안하면, 소기의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번 회담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연내 어려울 것으로 점쳐졌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이다.

현 정부의 임기 등을 고려할 때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데 남북이 인식을 같이 할 것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가닥이 잡힐 가능성이 높다. 통일부 당국자는 “미이행 합의사항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 상호 신뢰를 쌓아가면, 자연스럽게 답방 문제도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섞인 전망을 했다.


남한내 대북강경론 차단의도

북측이 당초 예상보다 앞서 ‘침묵’을 깬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8ㆍ15 축전 이후 불거진 남남갈등으로 ‘국민의 정부’의 대북 화해ㆍ협력 정책이 손상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됐다는 관측이다.

즉, 남남 갈등이라는 ‘일시적 현상’ 때문에 ‘햇볕정책’이 후퇴하고 6ㆍ15 공동선언에 기초한 남북관계 개선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조기에 봉합하기 위해서, 또 대북 강경론이 득세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조평통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남측 당국의 8ㆍ15 돌출행동 관련자의 구속 처리의 배후세력으로 극우 보수세력을 지목하고 비난한 점,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국회 해임안표결을 앞두고 신중을 기할 것을 촉구한 점 등 일련의 상황으로 미뤄볼 때 북측이 남한 내 정치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 대화를 제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도 7일 성명에서 “8ㆍ15 축전 때 남북한과 해외의 각계 대표들이 남북대화 재개를 촉구함에 따라 당국간 회담이 열리게 됐다”면서 8ㆍ15 방북 행사의 의미를 강조, 이로 인해 풍비박산이 된 남한 정국을 무색케 했다.

북측은 그 동안 남한 내 ‘일부 보수우익세력’에 대해 집중적인 비난공세를 펼치면서도 남한 당국을 비난 대상에서 제외, 대화 여지를 남겨뒀다.


“역시 믿을 곳은 남한뿐” 인식

좀 더 실리적 차원에서 조망해 보면 북측의 대화공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1개월 간의 러시아 방문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등을 통해 ‘북방 3각 관계’을 다졌지만, 기대 이상의 경제적 이득은 챙기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2차례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정책에 대해 공동 보조를 맞추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논의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냉전시대 때처럼 ‘무상 원조’를 얻어내진 못했다.

러시아는 오히려 성의 표시로 수천 톤의 식량을 주겠다면서, 남한의 협조 없인 경제성이 보장되지 않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한반도 종단철도(TKR)연결을 독촉했다.

◁ 남북대화 재개로 그동안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던 경의선 철도복원 공사 등이 본격화 될 전망이다. 임진각 경의선 노반작업 현장.<조영호/사진부 기자>

중국도 사실상 마찬가지였다. 江 주석은 북한의 올봄 ‘왕가물’(가뭄) 피해를 위로하며 식량 20만 톤과 디젤유 3만 톤(3,528만ℓ)을 무상 지원한다고 통보했으나, 당초 예상치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혈맹’ 중국이 생색을 내며 지원할 식량 20만 톤은 일본이나 미국이 지난해와 올해 세계식량기금(WFP)을 통해 북한에 원조한 120만 톤 보다 적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대가로만 연간 1억달러 이상의 현금을 제공하는 남한을 되돌아볼 수 밖에 없는 대목인 것이다.


북미협상 대비한 포석

북측이 북미협상을 염두에 두고 ‘전면적 대화국면’으로 전환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측이 중국 러시아 등 북방 3각 관계의 외곽다지기를 통해 한반도 문제의 조율을 마무리, ‘자신감을 갖고’ 남북 및 북미 대화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江 주석의 방북 하루 전인 9월 2일 전격적으로 남북 대화를 제의한것도 중국의 남북 및 북미대화 촉구에 앞서 ‘어차피 재개할 대화라면 중국의 코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남북대화는 북미협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세현 국정원장 특보는 “북측은 남측과 성실하게 대화하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북미관계를 돌파하려 할 것”이라면서 “북측이 의외로 경의선 연결사업 등 미이행 합의사항 실천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남북대화 재개, 북미관계에도 순기능

정부도 이번 회담이 남북관계뿐 아니라 북미관계에도 순기능을 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부는 24일 뉴욕, 10월 18일 서울에서 잇달아 열릴 예정인 한미 정상회담 이전에 가동된 남북대화가 그 동안 남북관계 경색의 주요 원인이었던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변화를 추동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해 남북 및 북미관계가 진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미국의 변화를 설득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해왔다.

미국 입장에서도 단절상태인 북미 대화에 부담을 갖고 있다. 특히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강경 입장이 햇볕정책에 타격을 주었고, 이런 상황이 급기야 한미동맹의 악화로 이어져 미국의 동북아 이익이 위협 받게 된다면 부시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외교적 실책이 된다.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에 정치적 승부를 걸고 있지만, 한미동맹이 걸려 있는 부시로서도 ‘긴장하고 있는 김 대통령’을 무난하게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이를 반영한 듯. 미 국무부는 남북대화 재개에 대해 “남북 대화는 항구적인 평화구축에 요긴하다”고 전제하면서 “미국은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이뤄지길 바란다”는 입장을 잇따라 밝혔다.

이동준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9/12 16:29


이동준 정치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