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폴제, 정유사 '기름대전'

가격인하 치열한 주유소 쟁탈전

자유로에서 일산신도시로 진입하는 장항 인터체인지(IC) 부근. 차량통행이 많은 만큼 주유소 8개가 밀집해있는 이곳에선 요즘 ‘기름대전’이 한창이다.

◁ S- 오일은 9월4일부터 휘발유가격을 종전보다 리터당 49월 내리고 제휴카드인 하나은행 비자카드 사용시 30원을 더 내린 리터당 1,235원에 판매하고 있다.<김동호/사진부 기자>

일산방향으로 6개, 서울방향으로 2개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고, 정유업체별로는 LG칼텍스정유 3개, SK㈜와 현대정유가 각 2개, 에쓰오일(S-OiL)이 1개로 총 8개 주유소가 다닥다닥 붙어서 제각기 가격과 서비스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9월부터 한 주유소에서 다른 정유사의 제품까지 팔 수 있는 복수 상표 표시(폴사인)제가 실시되면서 이들 주유소들의 눈치작전도 한층 치열해져 정유사들의 ‘대리전’을 치르는 양상이다.


에쓰오일 반란, 타 정유사 '울며 겨자먹기'

이곳의 기름대전은 인근 SK LG 등 거대 정유사 계열 주유소로부터 늘 협공을 받아오던 에쓰오일 주유소의 ‘반란’에서 시작됐다.

이달 3일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휘발값을 종전보다 49원이나 낮은 1,265원으로 낮추면서 운전자와 차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제휴 회사인 하나카드를 사용할 경우 30원을 더 할인해줘 1,235원까지 인하했다. “평소 하루 5,000리터 판매하던 것이 기름값 인하 이후 1만7,000리터 이상으로 늘어났다”는게 주유소 관계자의 말이다. 판매량이 3배이상 늘어난 셈.

인근 에쓰오일 주유소의 가격인하 소식에 고객들의 동향을 살피던 인근 주유소들은 며칠 후 비상이 걸렸다. 운전자들이 싼 기름을 찾아 ‘대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인근 주유소들은 LG와 SK 현대정유 등 정유사와 대리점에 “우리도 에쓰오일처럼 싸게 기름을 공급해달라”고 아우성쳤다. “이러다간 망한다. 안그러면 우리도 에쓰오일 기름을 취급하겠다”는 협박성 전화도 이어졌다.

결국 SK와 LG계열 주유소들도 휘발유 값을 에쓰오일과 비슷하거나 약간 높은 수준으로 인하했다. 대부분이 1,300원 안팎. “적자가 나더라도 고정 고객과 기존 시장을 지켜야 한다”는 게 주유소 관계자의 볼멘 소리다.

이들 주유소들은 각종 카드포인트 적립과 경품 행사 현수막을 큼지막하게 내걸고 운전자들을 유혹한다. 일산 신도시 장항IC 부근에선 운전자들이 기름값이 더 싼 주유소를 찾아 기웃거리고 자신의 주유카드를 이리저리 살피는 풍경이 일상화했다.


정유사 공격적 마케팅, 업계 지각변동

주유소 복수폴사인제가 시행되면서 정유업계와 주유소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정유사들은 이를 계기로 시장장악의 관건인 주유소 쟁탈전을 위해 휘발유가격을 대폭 인하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기 시작했고, 전국에 난립해있는 주유소들은 정유사와의 협상력을 높이고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다.

비싼 국내 기름시장의 틈새를 뚫고 수입 석유류를 팔아왔던 석유 수입업체들은 정유사들의 저가 공세에 고사위기에 처하는가 하면, 그동안 암암리에 거래되던 덤핑유(싼 값에 파는 재고 기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복수폴제가 시행된다는 것은 예견돼왔고 정유사들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다. 하지만 정유사와 주유소 모두 서로 눈치만 보며 물밑에서 움직여왔다.

D-데이 0일. LG정유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LG는 9월1일 자정부터 휘발유값을 1,314원(직영 주유소 최고소매값 기준)에 동결하고 등유 경유는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LG 측이 환율불안이나 국제유가 인상등 다소 기름값 인상요인에도 불구하고 동결하기로 결정하자 업계에서는 그동안 에쓰오일과 SK의 가격주도권을 빼앗겼던 LG가 선수를 친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난 3일 정유업계의 '반항아' 에쓰오일이 소매 기름값을 49원 내린다고 발표하면서 정유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50원에 가까운 인하는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가장 큰 폭의 인하.

에쓰오일은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인하폭을 소매가 기준으로 해 기존 리터당 1,314원에서 1,265원으로 낮췄고 주유소에 공급하는 휘발유의 공장도 가격은 1,190원으로 대폭 내렸다.

이같은 공급가는 수입휘발유 수준. 복수상표 표시제가 허용되자, 에쓰오일이 다른 정유사들보다 훨씬 싼 값에 휘발유를 공급, 주유소를 새롭게 더 확보하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내수에서는 꼴찌지만 휘발유의 수출비중이 높은 에쓰오일은 이정도 가격에 주유소에 기름을 공급해도 손익계산이 괜찮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 복수폴사인제 실시로 정유사마다 직영주유소를 앞세운 고객잡기에 비상이 걸렸다. LG정유와 SK의 사은 및 고객서비스행사 모습

허를 찔린 SK는 다음날인 4일 주유소 기름 공급값을 에쓰오일과 똑같은 1,190원으로 낮추고 소비자 판매가는 주유소 자율에 맡긴다고 발표했다. 인하폭은 29원. 결국 주유소 공급가는 같고 소매값은 주유소에 따라 다르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49원 내린 에쓰오일이 훨씬 많이 내린 것으로 인식됐다.

LG도 시장 잠식을 더 이상 두고볼수 없게 되자 5일만에 동결방침을 번복하고 SK와 똑같이 내렸다. 결국 3사의 주유소 기름 공급가는 5일만에 같아졌다. 정유사 모두 시장과 고객을 빼앗기지 않기위해 울며겨자먹기로 가격을 내린 셈이다.


수입업체 입지 축소, 대형정유사도 수익 악화

업계에서는 복수 상표표시제 실시로 석유값 인하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뜩이나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국내 정유업체들이 사활을 건 생존게임을 벌이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게다가 이달 들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으로 국제 원유가격이 가파른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어 인천정유의 법정관리 신청에 이어 채산성 악화에 따른 국내 정유산업의 재편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유사별로 인하폭은 다르지만 업계의 ‘따라하기’ 경쟁으로 정유사가 주유소에 넘기는 휘발유의 도매가가 1,190원으로 낮아지면서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석유류 수입업체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것은 물론 대형 정유사들도 수익악화로 고민하고 있다.

LG정유 관계자는 “당초 면밀한 손익계산과 검토 끝에 기름값 동결했지만, 주유소들의 반발과 시장잠식을 우려해 가격을 다시 내릴수 밖에 없었다”며“복수폴사인제 실시로 자칫 정유업계가 제살깎기식 경쟁을 벌여 동반 부실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최근 국제 원유가가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연말에는 더 강세를 띨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상대적으로 가격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던 에쓰오일과 SK㈜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가 이달 1일부터 하루 100만 배럴 감산에 들어가면서 국제유가는 지난 5월말 이후14주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0월물 서부텍사스 중질유(WTI)는 전날에 비해 배럴당 63센트 오른 27.58달러를 기록했으며 10월물 난방유도 갤런당 1.61센트 상승한 78.32센트에 장을 마쳤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올 4분기 세계적인 경기침체 속에 국제 유가마저 강세를 띨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오고 최근 안정세롤 보였던 환율마저 점차 불안해지고 있다”며 “원가는 오르는데 반해 판매가는 갈수록 낮아져 정유사들의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수익악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유사들은 당분간 낮은 기름값을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경쟁심리 때문에 소비자가격이 비슷비슷해졌기 때문. 실제로 같은 상권(예를 들어 차로의 같은 방향에 늘어선 주유소)의 주유소 판매가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올들어 줄곳 기름값을 낮추며 가격주도권을 쥔 에쓰오일도 시장점유율을 늘리지는 못했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소비자들에게 에쓰오일은 싸다는 이미지를 심는데는 성공했다”며 “시장여건이 성숙되면 복수폴제에 따라 에쓰오일을 함께 취급하는 주유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분간 기존 SK와 LG 주유소들이 에쓰오일 기름을 파는 말그대로 복수폴을 할 것 같지는 않다는게 정유업계의 분석이다.

우선 석유 공급권을 쥔 거대 정유업체를 상대로 복수상표를 부착할 수있는 자금력과 영업력을 가진 대형 주유소가 드물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의 주유소는 1만454개. SK가 3,765개로 시장점유율 36%를 차지하고 있고 LG정유 26.4%(2,764개)로 뒤를 바짝 추격하고있다.

현대정유는 2,160개로 20.7% 3위, 에쓰오일은 1,370개 13.1%로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3.8%(395개) 주유소는 특정 회사 간판을 걸지 않고 여러 회사 기름을 파는 이른바 무폴 주유소.


난립 주유소업계 구조조정 효과 기대

이중 정유사가 직접 운영하는 직영주유소 제외하면 다른회사 간판을 함께 달수있는 자영 주요소는 7,000여곳에 불과하다.

주유소협회는 게다가 복수폴을 하려면 주요소는 별도의 석유저장탱크 확보 등을 위해 최소 350평 이상의 부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지만 이 같은 여건을 갖춘 주유소는 전체 주유소의 약 20~30%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유업계는 오히려 복수폴로 제대로 장사를 하려면 600평 이상의 부지는 갖춰야 한다며 업체별 직영주유소(20%)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복수상표를 시행할 수 있는 곳은 3%미만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자영주유소 대부분은 정유사나 대리점으로부터 시설자금을 빌려써 사실상 독립경영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 자영주유소 중 정유사에 빚을 진6,000여곳은 복수폴사인을 내걸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나머지 1,000여개 주유소도 눈치보기는 마찬가지. 영세주유소 일수록 정유사가기름 공급을 끊을까봐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또 고객들이 많이 찾는 휘발유만 복수 업체의 제품을 취급하고 현재 크게 남아도는 등ㆍ경유는 특정 한 개 정유사 또는 무상표 제품을 판매하는 ‘변종’상표표시제를 하는 주유소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복수폴제가 현재 난립해있는 주유소업계의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효과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 주유소의 20%가량이 누적적자로 허덕이는 상황에서 복수폴이 시행되면 문닫는 주유소가 속속 생겨날수도 있다.

정유사들도 무차별적으로 주유소 확대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성 좋은 주유소 위주로 판매망을 정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덤핑유를 정상 기름에 섞어 팔거나하면 소비자의 피해가 생길 수도 있다. 정부당국이나 정유사들의 주유소에 대한 기름관리가 엄격하게 유지되기 힘들어 무상표 유류가 마치 고급 기름인 것처럼 팔릴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선 우선 복수폴사인제 실시로 주유소별로 천차만별인 기름값을 비교해보고 좀 더 싼 주유소를 찾는 일이 급하게 됐다.

이 때문에 기름값을 비교해 지역별 유종별 값이 싼 주유소를 알려주는 인터넷 기름정보 서비스업체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오마이오일(www.ohmyoil.com) 오일프라이스워치(www.oilpricewatch.com)오일프라이스(www.oilprice.co.kr) 코리아 오일프라이스(www.koreaoilprice.com) 등이 대표적인 업체들이다.

정유업계의 고객잡기 경쟁도 뜨다. 업계 1위인 SK㈜가 고정고객을 빼앗기기 않기 위해 4일부터 1,200개 거점 주유소를 중심으로 라면 화장지 우유 치즈 등의 14개 생필품 제조사와 제휴, 이들 상품에 OK캐쉬백 쿠폰을 부착, 출시하고 이를 오려서 주유소에 가져오면 현금 마일리지로 바꿔주는 서비스를 실시했다.

“복수폴 실시로 가격경쟁이 본격화함에 따라 알뜰 주부고객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게 SK의 설명.

이에 맞서 LG정유는 최근 맥도날드와 제휴, 계열 주유소에 맥도날드 점포를 개설하고 자동차를 탄 채 햄버그 등 간단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하는 서비스를 늘리고 있다.

에쓰오일은 신용카드 제휴로 하나비자카드를 사용하는 고객에게는 휘발유값을 1리터당 30원 더 할인해주고 있고 현대정유는 주유고객을 대상으로 순금카드를 주는 ‘황금 마케팅’을 하고 있다.

김호섭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09/12 17:36


김호섭 경제부 dre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