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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한지화로 세계를 사로잡은 함섭

[인간탐구] 한지화로 세계를 사로잡은 함섭

두드리고 붙이는 '노가다' 그림쟁이

화가 함섭(59)의 화실엔 붓이 없다. 팔레트도 없다. 물감이나 이젤도 버린지 오래다.

"내 팔레트는 저것이오! "색색의 종이다발을 가리킨다. 그 옆엔 바르다 만 풀통도 하나 앉아있다.더 옆으론 파란 솔들도 한가득 뒹군다. 그에겐 둘도 없이 중요한 화구들이다. 화실에 들어설때부터 풍겨나오던 뭔가 꿀먹한 냄새의 정체를 이제 알만하다. 그는 화단의 혁명가다.

함 화백은 전통 한지로 그림을 그린다. 그린다기보다 빚어낸다. 멀리서보면 여늬 추상화와 다를 바 없지만, 가까이서보면 겹겹이 한지를 붙여 만든, 종이와 풀이 숨쉬는 그림이다.

붓 한번 대지 않았다. 미세한 줄 하나도 한지를 던져 만든 선이다. 원하는 자리에 가 앉을 때까지 화가는 몇번이고 종이를 쥐고 던지고 던지기를 반복했다. 던지고 붙인 곳마다 생명이 붙었다.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킨 함섭의 그림이다.


종이와 풀이 숨쉬는 그림

"한 작품을 만드는데 만번 이상 두들기거나 던지는 작업들이 따랐습니다. 힘들긴 하지만 재미도 있습니다. 물성의 느낌, 두꺼우면 두꺼운대로 얇으면 얇은대로 종이가 주는 촉감도 다르고 어떤 사람이 만지느냐에 따라서도 그림이 제각각 달라집니다. "

이야기는 곧 전통한지에 대한 자랑으로 빠진다. 화가라는 사실을 빼놓으면 거의 전통제지업자로 착각할만한 수준의 열변이다. 찾기도 힘든 전통 한지공장을 수십년전부터 쫓아다니며 재래식 제지방법이나 염색법까지 배운 그다.

"우리 전통한지가 얼마나 우수한지 아세요? 그 얇은 종이를 물에 흠뻑 적신뒤 다시 펴보아도 뭉쳐지는 곳 하나없이 그대로 다 펴집니다. (잠시 자리를 뜨더니 어느새 물에 적신 한지를 들고와 눈앞에서 펴보인다 .그의 말 그대로다.)

하지만 이런 진짜 전통한지는 갈수록 보기가 어렵습니다. 요즘 인사동을 비롯해 시중에 나와있는 한지는 99%가 개량지입니다. 전통한지는 음력 11월에 닥나무를 채취해 삶은 뒤 그 껍질을 말렸다가 볏짚이나 콩짚, 메밀짚을 태운 재를 넣은 물에 삶습니다.

그리고 펄프를 떠내는 것도 외발뜨기 방법을 사용하고, 펄프를 떠있게 하는 것도 1년초인 닥풀의 뿌리에서 나온 액체를 사용하는 등 순 자연재료로만 만듭니다.

그런데 개량지는 볏짚 잿물이 아닌 양잿물에다, 펄프의 엉김새가 더 엉성할 수밖에 없는 쌍발뜨기 방법을 쓰고, 또 화공약품인 팜으로 처리합니다. 잘 보면 종이의 때깔부터가 다른데다 종이의 질도 전통것보다 훨씬 못 하고, 인체에도 좋지 않습니다.

가장 안타까운건 그런 차이를 잘 몰라서인지 멋모르고 개량한지를 전통한지인줄 알고 사다가 액젓을 걸러먹는 분들이 요즘 많은데 참 위험한 일입니다."

남의 집 액젓 깔때기까지 마음에 걸려하는 화가, 문득 팔을 내밀어 보인다. 한지화의 작업과정을 물은 후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두드리고 던지고 붙여서 만듭니다. 그 사이 워낙 팔이 튼튼해져 웬만한 팔씨름에도 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든 그림은 어떤 장사가 와서 찢으려해도 절대 안 찢어질만큼 질기고 강합니다. "

예술적 고민은 차치하고라도, 작업자체만으로도 대단위 노동이다. 먼저 한지를 깔고 그 위에 닥나무 껍질을 편 다음, 약 10장의 한지를 차례차례 붙이고 솔로 두드리는 일로부터 바탕작업이 시작된다. 약 5cm쯤 두툼하게 쌓인 종이가 5mm로 압축될 때까지 그의 화실엔 종일 퉁탕거리는 솔질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해서 바탕색이 어느정도 배어나면 본격적인 표현작업에 들어간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화폭에 옮긴다. 색색의 한지가 다양한 모양으로 놓이면서 그의 추상화가 만들어진다. 평면이든 입체든, 여전히 닥종이와 식물성풀, 단단한 솔질과 두 손의 체온을 통해서다.

"내 그림은 이래서 도록으로 내면 손해예요. 사진에선 그 특유의 질감이 제대로 보이지 않거든요. 종이로 된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사후관리가 까다로울 것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형도 없고, 좀도 슬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화나 아크릴화보다도 수명이 더 오래갑니다. 유화는 색을 내뱉지만, 한지는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두껍게 만들어도 한지그림은 숨을 쉽니다. "

한지화가로 불리기 전, 그는 유화를 전공한 수많은 서양화가들 중 한명이었다. 홍익대 미대, 동국대 교육대학원을 졸업, 약 27년간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병행했다. 수업이 끝나면 아예 근처에 얻어둔 작업실에 밤늦도록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 1960년대말까지 그런 생활이 계속됐다.


비교되기 싫어서 유화 버리고 한지화 선택

"하지만 한계에 부닥쳤습니다. 유화안에선 아무리 잘 그려봐야 서로가 너무나 비슷해 다른 작가와 다른 나를 독특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서양의 그림이니, 예를 들어 나랑 한 외국인이 각자 자기의 작품을 들고 나란히 걸어가더라도 남들이 보기엔 내가 그 외국인의 그림을 대신 들어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그 외국인이 내 작품을 들어다주는 것으로 착각하게 할만큼 나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리자, 그래서 찾은 게 한지화였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추종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예술가와 비교되기도 싫었습니다. 한지그림은 제게 더할 나위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6ㆍ25 전쟁통에 초등학교를 7년이나 다녀야했던 그는 당시 어느 미술시간에도 팽팽한 농구공을 가져다놓고 따라 그리라던 선생님 주문에 혼자 쭈그러진 공을 그렸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이유는 '판에 박힌 그림을 그리는 건 도무지 재미가 없어서'.

대학1학년의 신분으로 62년 강원도 미술전람회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도 당시 화단에선 흔치 않던 대담한 붓터치로 주목을 끌었다. 화가가 된 것도, 그중에서도 비구상 작가가 된 것도 '단체사진'처럼 살기 싫은, 그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처음 한지를 작품에 끌어들인 것이 70년대 초였다. 그때는 단순히 종이를 '찢는' 대상으로만 사용했다. 인간의 욕구불만과 파괴본능을 표현하면서 이미 찢어놓은 한지를 화폭에 붙여놓고 나머지 부분은 관객들이 마저 찢게 하는 실험작을 선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국내 화단에선 반향을 일으켰다. 남강 선생은 '싹수가 있는 그림'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적쟎은 미술상도 수상했다. 그러나 실험의 가능성만 확인한 채 조용히 막을 내렸다.

"과연 그것만으로 작품이 될까 확신이 서지 않아 다시 유화로 돌아갔다가 80년대초에 본격적으로 한지화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생활속에서 한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그럴수록 더 강한 확신이 들더군요.

더구나 이건 우리에게만 있고, 서양인들은 보지도 다루지도 못했던 독특한 소재이니까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건 어렸을적 석양이 질 때면 창호지문틈 사이로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빨간 노을빛이 일직선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광경, 방안에 있던 왕골위로 쏟아지던 그 빨간 빛줄기의 기억 같은 것들입니다. 애틋한 향수속에서 답을 찾아낸거죠. "

한지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앞지른 사람도, 당장 뒤쫓아오는 사람도 없으니 더욱 의욕이 새로왔다. 초창기 국내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워낙 전에 없던 시도라 화단에선 생경해했고, 일반인들은 '종이떼기' 이상으로 보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견딜만했다. 어느정도 각오한 바였고, 진작부터 그의 꿈은 국내가 아니라 세계 화단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왜? 작은 아버지때문에.

"제54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하신 함기용 선생이 제 작은 아버지입니다. 실제로 제 자신도 고등학교때 마라톤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늘 들려주신 말씀도 '너도 커서 네 작은아버지처럼 세계에서 1등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라톤을 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잘 뛰어봐야 제 능력으론 작은 아버지 꽁무니도 따라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결국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은 어려서부터 좋아했었고, 소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라톤 세계 1등은 못해도 어쨌든 이젠 화가로서 이름을 알렸으니 그럭저럭 제 몫은 한 것 같지요? "


해외에서 더 유명한 화가

그간 독일, 네덜란드 등 국내외에서 가진 개인전 18회, 스위스 바젤,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프랑스 FIAC 등 국제아트페어에 매년 참가, 인도 트리엔날레, 쌍파울로 비엔날레 등 국제전에 다수 참가.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먼저 이름이 알려졌다. 특히 국제아트페어에서는 진작부터 인기작가 반열에 올랐다. 98년 샌프란시스코 아트페어와 이듬해 시카고 아트페어에서 출품한 작품이 연이어 전량판매기록을 세우면서 집중시선을 받았다.

현재도 100호짜리 1점에 최소한 1만6,000달러를 호가, 일면 그도 미술계의 벤처다. 일찌기 새마을운동과 함께 고아가 된 전통한지를 이만큼 장성한 자식으로 내놓았다. 한국을 알린데다 고부가 가치 문화상품까지 만들어놨으니 그의 자부심은 더 남다르다.

"10년전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하겠다고 교사생활을 그만둔 후 한동안 고생도 많았습니다. 자신이 있어서 결정한 일이지만, 막상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 당장 경제적인 문제가 걸렸으니까요.

그래도 맨처음 집사람에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얘기를 꺼냈을때 '당신이 얼마나 그림을 좋아하는지 아는데, 우리가 좀 굶으면 어떻냐, 그만둬도 좋다'며 두말없이 찬성해줬습니다. 한때 의료보험료도 부담스러울만큼 힘든 시간을 겪어야했는데 언제나 집사람이 잘 견뎌주고 절 밀어줬습니다. 평생 집안 살림만 해 온 사람인데 저 못지않게 씩씩하고 통이 큽니다. "

그림뿐만 아니라 한지로 북을 만들기도 한 함 화백. 1999년 2월 개인전때엔 오프닝 행사에서 직접 만든 한지 전통북으로 합주를 하기도 했다.

"마라톤으로 말하자면 지금 제 인생의 37km 지점쯤 온 것 같습니다. 이만큼 왔으니 앞으로 기권을 하는 일은 없을테고, 남은 것은 얼마나 좋은 기록으로 끝내느냐 하는 것 뿐입니다. 갈수록 박수도 많이 받고 있으니 분명 좋은 기록이 나오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국제아트페어에 계속 참가하는 물론, 세계의 유명작가들의 작품만 걸린다는 국제 미술관 작가가 되는게 제 목표입니다.

저는 제 수명을 120세로 잡는데(웃음) 90세까진 계속 작품활동을 한 뒤, 나머지 30년은 그간 쌓은 것들을 누리는 시간으로 잡았습니다. 유화로 돌아가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너무도 즐겁고 바쁜데 뭣하러 다른 것을 하겠습니까."

그의 '마라톤'을 지켜보고 싶은 사람은 서울 박영덕화랑에 들러보면 된다. 현재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9월 16일까지 계속될 '종이의 혁명'전이다. 시간운이 좋다면 나이와는 달리 머리만 그림처럼 하얄뿐 청년처럼 건장하고 유쾌한 함 화백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차(茶)에도 조예가 깊은 그가 과연 종이 부스러기 투성이의 화실에서 마시던 것처럼 맛있는 말차를 내 줄지는 의문이지만.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09/1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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