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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황진이·춘향은 페미니즘의 선각자였다

논개·황진이·춘향은 페미니즘의 선각자였다

한가위 맞아 세 독특한 무대

남정네들이 만든 굴욕의 역사를 껴안고 검푸른 강물속으로 수직낙하하는 논개, 남자의 비겁함과 허영끼를 온몸으로 비웃는 황진이. 때로는 순수로, 때로 도발적 몸짓으로 귀한 집 자제 몽룡도령의 애간장을 녹이더니 마침내는 완고한 관습을 희롱하던 춘향이.

황진이가 박연폭포를 두고 서화담과 풍류를 주고 받던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후세는 송도삼절이라 기린다. 이제는 그렇다면 조선 페미니즘 삼절이다. 각자 특유의 방식으로 ‘여성됨’을 과시했던 세 여인의 선각자적 몸짓에 올 한가위 보름달이 뒤척인다.


황진이의 삶 그린 '청산에 나빌레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어/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초승달 하나가 요염하게 솟아 있는 밤, 조바위 덮어 쓴 기생 황진이가 청아하게 부르는 시조창은 예사롭지 않은 무대를 예고한다. 극단 연우무대의 ‘청산에 나빌레라’.

양반 사회는 꿈도 못꿀 생기발랄한 언어, 시인ㆍ묵객 뺨치는 정제된 언어, 언뜻 상반되는 이 둘이승화돼 황진이의 삶을 그렸다. 그러나 평면적 서술은 거부한다. 연극 초입, 관객이 제시받는 장면은 뜻밖에도 처연하기 짝이 없는 풍경 하나.

“늙고 지친 황진이 저꼴 좀 보게. 젊은 날 뭇 사내를 희롱하던 미색은 간곳 없네. (중략) 양식을 구하려 몸까지 팔았네.” 코러스는 말년의 황진이가 겪고 있는 곤궁한 처지를 넌저시 말해준다. 이 극은 이처럼 객관적 정황을 언어화해 주는 희랍극적 코러스가 곳곳에서 적극 구사된다.

우리 전통을 재현하려는 노력이 집요하다. 인하대 의류학과 조우현 교수가 재현한 80여벌의 전통 복식은 무대에 사실성과 더불어 품격을 더해준다. 때아닌 ‘한복 패션쇼’다. 철저한 고증에 따라 천연염료와 수작업으로 재현된 덕택이다.

청각적으로도 전통에 충실하다는 점이 또 하나의 자랑. 느릿느릿 유장하게 굽이 쳐 가는 시조창과 가곡의 멋을 만끽할 자리다.

전통 예술하면 판소리(창극), 민요(마당놀이), 풍물(사물놀이)만 알고 있기 십상인 요즘 관객에게 또 하나의 계시처럼 다가올 무대다. 연출자 정한룡씨는 “정가의 품격과 절제미를 무대예술속으로 수용, 새로운 한국적 가극의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말했다.

질펀한 우리말이 재미를 더 한다. “계집이 잘 나면 얼마나 잘 나겠나? 그저 사흘이 멀다 하고 두들겨 패서 나긋나긋하게 만들어 놓으면 그 궁둥이가 그 궁둥이야, 안 그래?” “

이 극은 너무 때 이르게 태어난 걸출한 페미니스트에 바치는 아름다운 조문이다. 황진이에게 넋 나갔다 자신을 돌아다 보는 선비 이사종의 말을 들어보자.

“그래 맞았어. 저 심술! 쩔쩔매는 사내의 꼴을 보고 즐기는 게 낙이니까. 벽계수를 놀려 먹고 세인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지족(스님)을 농락하여 파계시키고…그리고는 분명 혓바닥을 낼름했을…글쎄, 요물이 따로 없다니까.” 이쯤되면 저주가 아니라, 역설적 찬사다.

극의 말미, 초라한 행색의 그녀는 진정한 맞수 서화담과 만난다. 그 옛날 자신의 유혹을 물리쳤던대선비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담이 권유한다. “복색은 누추해졌으나 인생의 속내를 안 모습이야. 무르익은 된장 같다고나 할까. 지금은 산중이고 아무도 없으니 한 번 합시다. 이제야 옛날에 못 푼 정분을 풀겠군.” 화담이 옷을 벗으려 하자, 오히려 진이가 뛰쳐나간다.

황진이가 황천 가는 대목은 이 연극의 백미. 코러스가 그녀의 시조 한수를 읊으면 시체를 그냥 두라는 그녀의 유언이 이어진다.

기생들의 시신 수습, 사자밥 장만과 염하는 장면 등 낯선 풍물이 사이버 시대 관객앞에서 라이브로 펼쳐지고 막은 내린다. 이응률 김학선 작, 전한룔 연출, 한재우 김세동 박남희 등 출연. 15~25일 문예회관소극장.월~금 오후 7시 30분, 토ㆍ일 오후 3시 6시. (02)762-0810.


창극무대로 재현한 논개의 '일길'

논개의 초상이 맑푸른 남강위로 떠오른다. 힘좋은 왜장의 허리를 껴안은 손가락이 행여 풀어질까 가락지를 깍지 끼는 그녀를 상상해 보았는가. 마침내 한떨기꽃으로 떨어질 때, 그 찰나에는 얼마나 많은 상념이 밀어 닥쳤을까. 잠들고 있던 논개의 창극 무대로 재현된다.

한가위 국악 무대 하면 악ㆍ가ㆍ무가 흐드러지는 명절 국악 무대의 풍경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첨단 매체의 시대, 국립창극단의 ‘논개’는 지금껏 보아 온 여늬 한가위 무대의 상투성을 벗어난다. 동시에 조령모개의 습성을 여전히 답습하는 일본인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야심작이기도 하다.

가슴 저미는 투신 대목때 영사막위로 투영되는 영사물에는 현대적 이미지가 가득하다. 빔 프로젝트가 토해내는 짙푸른 물빛, 왜군이 난사하는 총과 대포 소리 등 시청각적 특수 효과가 함께 한다. 별난 창극 무대다. 연출자 한태숙씨는 “심리를 보는 무대”라고 말한다.

심리의 가장 큰 축은 여성의 자아발견과 사회참여. 평소에는 헛기침 깨나 하던 남정네들이 왜병의 창궐을 보고는 앞다투어 꽁무니 빼던 시절, 분연히 떨쳐 일어선 논개는 일갈한다.

“아하! 이몸이 남자라면 못할 일이 없것꾸나. 이리오너라, 남아장부 주논개 나가신다!”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기생’이라는 이미지 이면에 깔린 사랑과 슬픔, 시대와 개인의 문제 등 지금껏 간과해 온 부분까지 무대화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입에 짝짝 들어붙는다는 3ㆍ4조, 4ㆍ4조 운율의 묘미가 이 무대 어디서나 가득하다. 극작ㆍ연출가 오태석씨의 극단 목화에서 잔뼈가 굵은 홍원기씨의 극본 덕택이다.

그러나 뭣보다 타이틀 롤이 최대의 관건. 중요 무형 문화재 23호(가야금 산조 및 병창) 안숙선씨가 논개로 직접 출연, 깊은 연륜을 확인케 한다. 이번에 그는 예술감독으로 무대를 총괄하기까지 한다.

연기량 많은 논개는 더블 캐스팅이다. 또 한 명의 논개는 ‘홍보가’ 완창의 실력파 유수정씨. 1982년 남원 춘향제 판소리 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 이력에 흠결을 내지 않으려 연습실을 달구고 있다.

이 창극은 소녀 논개역까지 배려, 극적 사실성을 살리는 데도 힘을 썼다. 199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 이번 무대에서 ‘제 2의 안숙선’으로 거듭나겠다는 투지로 똘똘 뭉친 유주현의 옹골찬 연기가 창극의 세대 교체를 예고한다.

국립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무용단 등 국립극장의 역량이 총집결될 이번 무대가 필요로 하는 인력은 100여명.

29~10월 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월~금 오후 7시 30분, 토ㆍ일 오후 4시. 2274-3507

장병욱기자 aje@hk.co.kr

입력시간 2001/09/1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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