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3대악재 행방] 돌아선 은행… 하이닉스 침몰 위기

신규지원 없이 회생 불가능, 법정관리도 쉽지 않을 듯

거함 하이닉스 반도체의 침몰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며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채권단은 당장 급한 불만 끈 채 시한을 연장해 놓았지만 우리 경제는 하이닉스 변수에 위태위태한 곡예를 이어가게 됐다.

금융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과감한 결단을 통해 조속히 하이닉스를 법정관리 하는 것이 손실을 줄이는 길이라는 주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 김경림 외환은행장이 14일 외환은행 본점 대회의실에서 열린 (주)하이닉스 반도체 채권금융기관 협의회에서 회의개회를 알리고 있다. <연합>


은행들 "더 이상 지원 할 수 없다"

하이닉스의 생사(生死)를 결정짓는 채권은행 대표자 회의를 앞둔 14일 오전. 주채권 은행인 외환은행 내부에 갑자기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내심 하이닉스 지원에 동참할 것으로 기대했던 은행들이 ‘신규 지원 불가’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는 소식이 속속 전해져 온 것.

자칫 5,000억원 신규지원 때문에 3조원 출자전환 등 기존 채무재조정안 마저도 통째로 부결되는 최악의 경우에 직면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외환은행이 부랴부랴 내놓은 수습책은 기존 채무재조정안과 신규 지원안을 분리시킨 뒤 신규 지원은 추후 재논의한다는 것.

미국 동시다발테러 사태로 인해 반도체 경기 예측에 좀 더 시간이 걸린다는 ‘훌륭한’ 구실도 마련했다.

결국 이날 오후4시. 회의에 참석한 18개 은행 대표자들은 별 망설임없이 외환은행측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하이닉스의 생사 판단을 일단 후일로 미뤘다.

외환은행이 하이닉스 재정주간사인 살로먼스미스바니(SSB)의 분석을 근거로 내놓은 종합정상화 방안은 ▦기존 대출금 3조원 출자전환 ▦1조원 유상증자 실시(5,000억원 목표) ▦기존 여신 5,000억원 가량 만기 연장 및 금리 조정 ▦내년 상반기 회사채 상환용 자금 3,700억원 조기 전용 ▦일반 수출환어음(D/A) 한도 8억달러 중장기 일반대출로 전환 ▦투신사 보유 회사채 및 리스사 보유 리스채 만기 연장 등. 새롭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유하고 있는 여신을 주식으로 전환한다든지 만기를 연장하는 등의 내용이었기 때문에 채권은행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미국측으로부터 통상압력의 집중 공략대상이 되자 기관 보유 회사채는 물론 개인 보유 회사채까지 신속인수를 해줄 수 없다고 나서면서부터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다.

연말까지 당장 5,000억원 가량의 자금이 비게 될 처지에 놓이자 외환은행과 SSB는 긴급히 5,000억원의 신규자금 지원 안건을 정상화 방안에 포함시켰다. ‘2002년도 설비투자용’이라는 것이 외환은행측 설명이었지만 어차피 돈에 꼬리표가 달려있지 않은 만큼 사실상 개인 보유 회사채 상환자금이나 다름 없었다.

신규 지원이 정상화 방안에 포함되면서 채권은행들의 분위기도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지원해 준 자금은 손해볼 수 있어도 더 이상은 한 푼도 지원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신한, 하나, 한미 등 후발은행은 물론 국민, 주택, 제일은행 등도 ‘지원 불가’ 입장으로 돌아섰다.


극심한 자금난, 테러사태도 돌발 악재로

그렇다면 하이닉스는 과연 신규 지원 없이 기존 채무를 재조정하는 것만으로 회생이 가능한 것일까. 금융시장과 업계 전문가들은 물론 정상화 방안을 주도한 외환은행과 SSB 조차 신규 지원 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김경림 외환은행장은 14일 회의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신규 지원이 없으면 하이닉스의 회생은 불가능하다”고 시인했다.

하이닉스 박종섭 사장도 최근 채권은행을 돌며 지원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반도체 가격 예측, 기존 주주 유상증자, 자산 매각 등 어느 것 하나라도 틀어지면 솔직히 회생을 자신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객관적 수치도 하이닉스의 회생에 부정적이다. 반도체 생산업체는 매년 약 2조원 가량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 상식.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린 하이닉스는 최근 2년간 신규투자를 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연구개발력과 제품경쟁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반도체 가격이 괜찮았던 지난해에도 하이닉스는 매출 8조9,000억원 부채 11조6,000억원, 그리고 손실 2조3,00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 규모보다 부채규모가 크고 호황에도 불구하고 수조원대의 손실을 기록한 기업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황에서 신규 자금 투입없이 회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미 SSB 보고서가 발표됐을 당시부터 “이번 채무재조정안으로는 하이닉스 회생을 보장할 수 없다. 회생 시키려면 더 확실한 지원을 하든지 아니면 과감하게 법정관리에 넣어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게다가 미국 테러사태라는 돌발 악재는 하이닉스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이번 사태로 정보기술(IT) 산업의 침체가 장기화하고 반도체 가격도 더욱 추락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

2002~2003년 반도체 가격을 1.5달러(64MD램 환산 기준)로 잡고 정상화 방안을 내놓은 SSB의 보고서도 반도체 가격 전망을 하향 조정해 다시 수정해야 할 수도 있는 처지다.

문제는 최소한의 신규지원액인 5,000억원 조차 거부한 마당에 반도체 시장 악화로 추가 투입돼야 할 자금 규모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할 때 어느 은행이 선뜻 동참하겠느냐는 점이다.

“미 테러 사태로 인한 반도체 가격의 추이를 지켜본 뒤 신규지원 규모를 재검토해 다시 논의하겠다”는 외환은행측 발표가 사실상의 신규 지원 무산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채권단 내부에서는 일단 시간을 확보한 만큼 금융기관 대손충당금 적립, 관계사와의 방화벽 설치 등 충격을 완화시킨 뒤법정관리 수순을 밟는 것이 차선책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 경기의 불확실성이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무작정 지원하는 것은 손실 규모만 더 키울 것”이라는 얘기다.


"처리 지연시키면 경제 불안만 고조"

하지만 섣불리 법정관리행(行)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4%(약 60억달러)를 차지하고 있고 고용 인원 2만4,000명, 1차 협력업체 2,500개(약 15만명)를 거느리고 있는 하이닉스가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수출 감소, 고용 불안, IT부문 수출 경쟁력 약화 등 국가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금융기관 역시 은행 1조9,000억원, 투신과 리스사 각각 6,000억원 등 총 3조원 이상의 추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등 현대 관계자들의 동반 부실도 우려된다.

현재 상황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확실한 지원이든 법정관리든 하이닉스가 우리 경제에 엄청난 짐이 될 것이라는 점. 또 하나, 더이상 미적거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결정을 미룬 채 하이닉스처리를 지연시킬 경우 경제 불안만 점차 고조될 것”이라며 “신속히 생사를 결정짓는 것이 그나마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태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09/18 20:05


이영태 경제부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