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911 테러 대 참사] 현실을 닮은 테러, 테러를 닮은 현실

영화로도 그려내기 어려운 재난이 실제상황

‘먼저 국내선 항공기 8대를 납치한다. 그리고 WTC(세계무역센터)를 2대의 여객기가 공격한 후 다시 펜타곤(국방부)을 치고. 이어 필라델피아로….’ 아마 할리우드 영화사에 이런 시나리오를 제출했었다면? 퇴짜 맞았을 확률이 크다.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여긴 미국이야.”

△ 미국이 항공기 테러참사는 영화와 현실이 뒤섞인 둣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뉴욕시민들의 대피모습과 세계무역센터 붕괴 후의 처참한 풍경 그리고 영화 '에어 포스 원'과 '콘 에어'(왼쪽부터)

그러나 시나리오 한편에 500만달러를 받는 할리우드의 내로라 하는 작가들도 아마 이런 ‘현실’은 상상도 못했다.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듯한 익숙한 화면, 그러나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점에서 보는 이들을 탄식에 빠지게 했다.


현실 닮은 테러영화가 오히려 주눅

때문에 현실보다 더 먼저 제작됐지만‘현실을 너무나 많이 닮은’ 영화들은 오히려 주눅이 들고 있다. 영화가 재난을 불렀다, 혹은 영화가 재난을 이용한다는 비난이 두려운 것이다.

연방준비은행의 금저장고에서 엄청난 양의 금을 갈취한 범인들이 유유히 옥상으로 올라가 헬리콥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이들 비행기는 곧 WTC 쌍둥이 빌딩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공회전을 거듭하다 마침내 ‘쾅’. 바로 ‘스파이더 맨’이 쳐놓은 거미줄이 걸린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유머도 11일 뉴욕 대참사 이전의 얘기이다. 콜럼비아 영화사는 내년 4월 개봉 예정으로 지난 8월부터 전세계에서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는 ‘스파이더 맨’의 예고편을 사고 직후 회수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WTC 빌딩’을 그렸다는 점에서 세간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10월5일 개봉할 예정이었던 ‘무고한 희생자’ 역시 개봉이 미뤄졌다. 이 영화는 LA의 소방관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가족들을 테러로 잃은 뒤 또 다른 참사를 막기 위해 워싱턴을 폭격하려는 테러리스트들과 한 판 대결을 벌이는 내용이다.

인파가 몰린 대형 쇼핑센터의 붕괴는 역시 WTC 빌딩의 화이트 컬러 직장인의 떼죽음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게다가 다음 표적이 워싱턴이라니. 이런 영화를 예정대로 개봉했을 경우 “영화 개봉으로 겨우 가라앉혔던 슬픔이 되살아 났다”며 피해자 가족들이 줄줄이 소송을 제기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영화들이 ‘테러의 교과서’가 됐기에 사실 영화가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눈총도 피하기는 어려울것 같다. 할리우드 테러 영화의 종합편 같은 참사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만은 알게 됐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만 봐도그렇다.

사실 하이재킹(항공기 납치)과 항공기폭파는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선호하는 범죄이다. ‘에어 포스 원 (Air Force One)’은 대통령 전용기를 의미하는 데, 영화에서는 기자단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가 아주 간단히 미 대통령의 전용기를 납치한다.

영화 속 마샬 대통령(해리슨 포드)은 징집을 기피한 클린턴 전대통령같은 히피 출신이 아니라 베트남전 참전 용사 출신. 어느 영화에서나 악역을 맡는 게리 올드먼은 이 영화에서도 카자흐스탄 출신의 테러리스트 코르슈노프로나와 기이한 테러리스트를 연기했다.

‘터뷸런스’ 는 테러리스트이자 살인자인 레이 료타가 이송되는 와중에 자신이 탄 항공기를 피랍하는 설정이고, 우수에 젖은 니컬러스 케이지가 미국식 영웅으로 새롭게 태어난 영화 ‘콘 에어’ 역시 테러리스트들에게 조종간을 빼앗긴 여객기가 휘황한 라스베이거스를 향해 돌진하는 위험천만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테러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블랙 선데이’는 1972년 뮌헨 올핌픽을 피로 물들였던 팔레스타인 테러단인 ‘검은 9월단’을 소재로 한 것으로 이들이 납치한 비행기는 마이애미 슈퍼볼 경기장을 위협하며 8만여 관객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화이널 디씨전’에서는 460명의 승객을 태운 보잉 747이 납치되는 긴박한 상황을 그리지만 현실 만큼 처참하게 폭발하지는 않는다.


90년대 이후 재난영화의 주류는 하이재킹

테러 영화 특성 중의 하나는 주로 90년대 이후 항공기 납치, 하이재킹이 늘었고, 그 범행 공간은 주로 뉴욕이나 워싱턴이라는 점이다.

이국적 풍경의 샌프란시스코나 라스베이거스가 안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스카이 라인이 가장 높으며 인구가 밀집한 뉴욕, 미국의 자존심인 뉴욕이 표적 중에서는 가장 화려했다.

항공기는 90년대 이후 블록버스터 영화의 규모가 늘면서 채택된 새로운 소재. 이전 B급 테러 영화가 주로 지상전을 다뤘다면, 블록버스터는 공중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 줬다.

영화 속 테러리스트는 ‘007 시리즈’에서는 주로 러시아, 동구인이었고, 80년대에는 ‘람보’류의 전쟁 영화가 늘면서 오히려 테러 영화는 잠잠해졌다.

그러다 공산권이 붕괴한 90년대 이후 테러 영화는 다시 아랍 및 민족 갈등을 겪는 동구권 몇나라의 테러리스트를 ‘악당’으로 삼아 많은 화제작을 만들어 왔다.

영화 ‘피스 메이커’에서 배낭 속에 UN 건물을 통째로 날려 버릴 만한 폭탄을 장착한 듀산(마르셀루어즈)의 꿈은 조국 유고를 옛 모습으로 돌리는 것이고 ‘트루 라이즈’에서 CNN을 불러 자신들의 성전을 알리는 테러리스트들은 아랍 출신이다. ‘비상계엄’에서 뉴욕을 계엄군 천하로 만드는 요인을 제공한 것도 역시 아랍테러리스트.

재미있는 것은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테러 영화일수록 영화 속 테러리스트들에게 ‘인간적 명분’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피스 메이커’에서 듀산은 사라예보에서 아내와 딸의 시체를 안고 절규했던 인물이며, 불타는 보스니아 전장에서 피아노를 치며 복수를 결의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그들 영화에서 아군 영웅의 폭력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더욱 그럴듯한 적군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인간적 고뇌까지도 고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테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부시 대통령의 선언 어디에도 미국을 테러의 진앙지로 만든 근본적 원인에 대한 자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석유값 50센트를 줄이기 위해 10만명의 아랍인을 죽였다”( ‘에어 포스 원’에서 게리 올드먼)는 아랍인들의 항변 조차 현실 정치에서는 목소리를 읽는다. 어찌보면 할리우드의 영화는 뉴욕의 정치보다 훨씬 순진해 보인다. 아니면 한 수 위이던가.

박은주 문화과학부기자

입력시간 2001/09/19 10:58


박은주 문화과학부 jup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