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911 테러 대 참사] 평화의 이면에 도사린 피의 역사

테러는 증오를 먹고 자라는 문명의 사생아

미국의 40대 대통령 레이건이 니카라과의 테러 집단 반정부군(콘트라)을 두고 한 말은 테러리즘의 본질을 압축한다. “누군가의 테러리스트는 동시에 또 다른 이에게는 자유의 투사이다(One man’s terrorist is another man’s freedom fighter).”

테러리즘이 시대에 따라 발빠르게 변신해 오며 위세를 떨쳐 오고 있는 데 대한 명쾌한 해답이다. 테러는 증오를 먹고 자라난다. 지구상에 갈등과 증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테러 역시 지속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그래서 가능하다.

2000년 1월 12일 콜롬비아무장 혁명군(FARC), 17명의 민간인과 경찰 살해. 2월 22일 스페인 민족주의 동맹(ETA), 바스크 분리주의 사회당수 페르난도 부에사 차량폭탄사. 3월 10일 스리랑카 분리주의 동맹 타밀 타이거, 퇴근길 노상 폭파로 18명 살해…. 인터넷상의 ‘세계 정치 테러 데이터베이스’는 기록한다.

2000년의 압권은 9월 14일 콩고의 친정부 무장단 마이마이의 노상 테러. 르완다 분리주의자 100여명과 백인 금융가 6명의 목숨을 총기로 앗아 갔던 사건이었다.


21세기 인류 최대의 위협 요소

증오의 정치학 테러가 21세기 인류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이가 단지 그들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바로 집앞에서 산산조각 날 수 있다.

1934년 유고슬라비아 왕과 프랑스수상 루이 바르투 피습 사건으로 당시 국제 기구 LON(국가 동맹:League of Nations)은 테러에 대한 최초의 국제 규약을 채택했다.

당시 이탈리아와 미국만이 불참했던 이 헌장에서 테러리스트의 규정은 이러했다. ‘비타협적 인사나 집단에 대해 공포심을 유발할 목적으로 결성된 범죄도당.’ 이하 세부적 규정이 이어진다.

1.국가의 수반, 그에 준하는 인사, 세습인, 2.그들의 부인 혹은 남편 등에 대해 육체적 위협을 직접적으로 가할 목적으로 결성된 도당. 3.적대국의 공공 시설이나 기물 등을 파괴할 목적으로 결성되고 활동하는 도당. 4.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기 위해 인명을 위협하는 도당. 5.이같은 목적을 위해 무기와 폭약 등을 사적으로 제조하는 도당.

한 단계 더 나아가 무기가 적극 사용될 것이라는 관측이 이뤄졌던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 FBI 요원, 미국방성,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의 반테러 연구자 등이 모여 95년 7월 만들어진 국제 범죄 정의 연례 회보(International Conference on Criminal Justice)이다.

미국과 아랍 세계의점증해 가는 불안은 전지국적으로 확산될 것이란 경고 역시 이 연보는 빠뜨리지 않았다.

테러에 대한 관심은 서구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99년 3월 정치학자 최진태(35ㆍ영국세인트 앤드류스대 정치학박사)씨는 사이버 공간에 한국 테러리즘 연구소(www.terrorism.or.kr)를 개설, 운영중이다.

최소장은 “이번 미국 참사는 단순 납치ㆍ폭파를 넘어 납치한 항공기를 다시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다”며 “정교하게 훈련된 테러리스트에 의해, 테러 방식은 갈수록 예측 불허의 형태로 진화중”이라고 말했다.


갈수록 예측불허로 진화

연구소에 의하면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항공기 납치. 1931년 페루 혁명분자가 팬암 항공기를 납치한 이래 지금까지 900여회 자행된 테러 방식이다. 당초는 동구 공산권 국가에서 서방자유국가로 망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동 지역 테러 단체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항공기를 주요 타깃으로 삼으면서 항공기 납치는 심각한 테러로 일반에 널리 인식된다. 1969년의 경우는 일주일당 평균 2건 발생, 외신면을 시커멓게 장식했다.

납치는 폭파로 이어졌다. 1987년 KAL 858기 폭파 사건, 88년 12월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의 팬암 103기 폭파 사건 등 대규모 인명 살상 테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항공기와 공항의 보안 시설이 의외로 헛점이 많다는 점에다, 여러 방식의 납치 가운데 항공기 납치가 가장 용이하다는 테러리스트의 경험 덕택이다.

연구소의 전망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하다. 납치한 항공기 자체를 무기 삼아 피테러 국가의 상징적 건물을 가미가제식으로 육탄 돌격한 것은 방법과 파괴력에서 가히 테러리즘 역사의 신기원.

신기원의 시범 케이스가 된 미국의 대응책 역시 이에 상응하는 전대 미문의 수준, 더욱 잔인한 테러는 더욱 강력한 보복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해묵은 피의 논리가 반복된다.

펜타곤은 15일 이번 테러에 대한 미국의 4단계 대응 시나리오를 공개했다. 대규모 초토화 공격-미사일 공습-지상군 파견-다국적군의 융단 폭격. 다름아닌 초토화 작전이다.

부시 대통령이 복구 현장에서 복구대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곳을 폐허로 만든 자들은 우리의 응답을 듣게 될 것”이라 했던 다짐이 현실화되는것이다.

특히 미국 언론들이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이번에 공격 당한 곳 이외에도 보스턴, 애틀란타, 리치몬드 등 3곳도 테러 예상지였다”고 밝힘에 따라, 미국인의 분노는 사라진 세계무역센터를 뒤덮고도 남는다.

테러는 달의 이면과 같다. 기술이 계속해서 발달하는 것 처럼 테러 역시 끝없이 진보한다.


사이버테러, 새로운 유형의 파괴 효과

95년 1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는 구미 각국의 군수뇌부와 FBI 등 정보기관 고위 인사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다. 바로 세계 무역 센터에서 1993년 2월 벌어졌던 테러 사건 때문이었다.

애초에 기존의 테러와 같은 물리적 폭력 사태였다고 보고된 이 사건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됐던 것. 당시막 태동하던 컴퓨터 테러(computer terrorism)였다. 최첨단 테러.

겉보기에 물리적 파괴는 미미하다. 그러나 몇주 동안 컴퓨터 간의 연결이 마비, 수천개의 기업이 곤욕을 치렀다. 연구에 의하면 사건 발생 첫주에 입은 손실이 적어도 7억 달러. 크게나눠 3가지 방식이 있다.

물리적 파괴: 폭탄, 화재 등 재래방식으로 컴퓨터를 부수는 것. 문법적(syntactic) 파괴:시스템 작동을 지연시키거나 예측 불능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논리 구조를 변화시키는것. 의미론적(semantic) 파괴:더욱 교묘한 방법. 정보가 컴퓨터 시스템을 드나 드는 순간을 이용, 정보에 수정을 가한다.

컴퓨터 테러는 테러를 가하려는 대상과 육체적으로 접촉하지 않고도 엄청난 효과를 거두는 차세대 테러 방식. 그 효과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겨냥한다. 소재 개발에 골몰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눈독 들이는 소재.

이들 테러 양식이 서로 결합돼 빚어낼 양상은 장차 일상의 수준에서 지구촌을 위협할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특수한 행태다. 테러란 평화 한가운데의 전쟁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가 실은 얼마나 취약한지, 헛점 투성이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역설적 계기로서만 테러는 유의미할 뿐이다. 테러는 문명의 사생아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9/19 11:44


장병욱 주간한국부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