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911 테러 대 참사] 남북, 테러 후폭풍 차단에 고심

북미정책 변화여부에 촉각, 중·러는 미묘한 동조

동북아가 미국의 테러대참사를 주시하고 있다. 동북아 정세의 최대변수인 미국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지역 관리정책에 수정을 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를 중심으로 상호의 존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한미, 북미, 남북관계는 한차례 진폭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분석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다.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표면적 안보상황은 테러사건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미국을 제외한 주변 3대 강국인 일본과 중국, 러시아가 테러를 규탄하고 철저한 응징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 부시 대통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남북한과 주변국들은 테러사건 혐의를 받고 있는 세력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지만, ‘반(反) 인륜적 행위’에 전율하며 미국의 대의명분에 완벽하게 동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미국과 주변 3강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특성을 감안하면, 테러사건은 지역의 안보균형을 깨뜨릴 ‘시한폭탄’이다.

이번 사건은 지역패권국이면서 세계 패권국인 미국이 동북아 뿐만 아니라 세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겠다고 작심하는 동인(動因)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변이다.‘세계 경찰국’ 미국은 이미 전쟁 수행 단계에 진입함으로써 사실상 레짐(regime) 재편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동맹 정치의 강화, 힘의 질서 재확인

미국은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했다. 패권국의 다짐은 국제법 이상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대미문의 ‘테러 말살 전쟁’에 1991년 걸프전 때처럼 동맹국 한국과 일본, 호주 등이 우선적으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동원될’ 공산이 크다.

한국의 경우 미국이 요청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걸프전의 전례를 들어 5억달러 상당의 현금,수송, 군수 물자를 지원을 상정하고 있지만, 전투병 파견도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다.

미국의 또 다른 주요한 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자동 개입’을 기정사실화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안정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여온 ‘동맹의 정치’가 다시 위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사건 발생 직후 블라디미르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공조’를 다짐했다.

사실 중국, 러시아에게도 테러는 현상 질서를 위협하는골칫거리이다. 러시아가 이슬람 원리주의로 무장한 체첸을 무자비하게 제압할 때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 마저 묵인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강대국에게 테러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하지만 좀 더 정밀하게 보면 유일 패권국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은 그 의미가 다르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동맹국과 함께 최첨단무기를 동원해 테러지원국을 난타할 경우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언제 위력을 발할지 모르는 미사일방어(MD) 체제와는 비견될 수 없을 정도의 속앓이를 하고 있다. 세르게이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이 14일 정색하고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위한 거점을 제공할 수 없다”고 공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99년 나토와 미국이 주도한 코소보 전쟁이 “패권질서에 반하는 국가는 주권도 행사할 수 없다”는 새로운 레짐을 제시했다면, 이번 군사개입은 힘에 의해 통치되는 세계질서를 확인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미국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남한을 비롯한 지역 내 동맹국들과의 안보공조를 강조할 경우 동북아의 세력균형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한미일 동맹이 강화할수록 북중러 북방 3각 관계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동북아는 신(新) 냉전에 진입할 수도 있다.


아슬아슬한 북미관계, 대화 늦어질 수도

미국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국가가 바로 북한이다. 미국은 사태 수습과정에서 관련 집단 및 배후 국가는 물론, 기존 테러지원국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 제5차 남북장관급 회담 첫날인 16일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에서 북측대표 김령성과 남측대표인 홍순영 통일부장관이 회의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이 과정에서 리비아, 이라크 등과 함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있는 북한이 ‘패키지’로 취급될 공산이 크다. 더욱이 미 정부의 강경기류는 미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구속력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미국은 87년 대한항공(KAL)폭파사건을 일으킨 북한을 88년 1월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 경제봉쇄 조치를 취해왔다.

미국은 지난해 북한과 3차례 테러회담을 갖고 ‘테러 반대확약’을 받았지만, 새로 집권한 부시 행정부는 일본항공을 공중 납치한 적군파 요원에 대한 피신처 제공을 지적하며 북한을 다시 테러지원국으로 못박았다. 당시 북한 외무성은 “천만부당하다”면서 “국제테러의 원흉이 우리를 무근거하게 걸고 들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미국이 강경해지면 북미관계의 핵심인 테러지원국 해제를 통한 관계정상화, 즉 북한 체제 인정은 요원해진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수습→복구→응징’의 수순을 밟는 과정에서 대북문제가 당분간 ‘잊혀진 현안’으로 치부돼 북미대화 재개가 늦춰질 가능성을 지적한다. 미국이 대북대화 의제로 상정하고 있는 핵, 미사일, 재래식무기 등에 대한 기대수준도 한층 엄정해질 수 있다.


미국을 향해 손짓하는 북한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북한 조명록(趙明祿) 특사가 지난해 방미 당시 테러반대 입장을 밝혔던 사정과 미국내 여론의 초점이 MD 문제에서 대(對) 테러 문제로 옮겨감에 따라 MD 추진의 명분을 제공했던 북한 위협론이 고개를 숙일 개연성 등이 반론의 골자다.

그러나 MD를 집권 명분으로 삼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이번 사태로 이를 포기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다.

북한도 북미관계 추이의불가측성을 내다본 듯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북한은 사건 발생 하루 만인 12일 미국에 대한 동시다발 테러를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을 ‘테러의 왕초’라고 비난해왔던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번 사건이 테러리즘의 위험을 상기시켰고, (북한은) 모든 형태의 테러, 그리고 테러에 대한 어떤지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이 같은 입장 발표는 이번 사건이 북미대화의 걸림돌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다.


탄력받는 남북관계

미국의 테러사건은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하도록 추동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15일부터 서울서 재개된 5차 남북장관급 회담과 관련, “모든 성의와 노력을 다해나갈 것”이라면서 “좋은 합의들이 이룩돼 통일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북측이 남북회담 전에 긍정적 메시지를 준 것은 처음이다.

북측의 입장 표명은 미국의테러참사로 조성된 ‘호전적’ 국제정세를 남북회담을 통해 돌파해 보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내보인 것으로 파악된다.

즉, 남북관계에 속도를 냄으로써‘대화 가능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제고, 테러 노이로제에 걸린 미국과 불필요한 충돌 없이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북측은 남한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정치적 고려도 한 것으로 보인다.

8ㆍ15 방북단 사태 이후 남한내에서 불거진 남남갈등으로 진퇴 논란에 휩싸인 햇볕정책에 힘을실어주겠다는 의도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남북 ‘반테러선언’추진

남한은 미국의 테러사건이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13일 이번 장관급 회담에서 ‘남북 반(反) 테러선언’ 추진을 지시한 것도 북측의 전략적 판단을 활용하면서, 미국의 테러참사가 남북관계에 미칠 후폭풍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 해석된다.

통일부 관계자도 “북한이 이번테러사건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북미관계를 풀기위해선 남북관계 개선이 필수요건”이라면서 “북측이 스스로 밝힌 대로 ‘좋은 성과’를 내 신뢰를 쌓길바란다”고 말했다.

이동준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9/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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