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흔들지마" vs "민주당 하나회"

동교동계와 김근태 최고위원 정면대결

"김근태 최고위원이 재야민주화운동 시절의 투사로 되돌아간 것 같다"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한광옥 대표 지명에 반대하면서 동교동계를 향해 연일 직격탄을 퍼붓자 당내에선 "늦었지만 진짜 투사가 된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웬 민주 투사냐" "투사로 나선 것은 좋지만 한 발 늦었다" 등 여러 갈래 평가가 나왔다.

재야시절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을 지내며 투옥됐던 김 최고위원은 9월 1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비장한 표정으로 "지난 날 민주화운동 할 때가 생각난다. 김근태가 투쟁하다가 고립되면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이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자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동교동 해체 주장은 당을 해체하란 말이나 다름 없다"고 반박하면서 양측 갈등이 확산됐다.

◁ 김근태 최고위원이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고 나서 민주당이 시끄럽다.

당내 뿌리와 한 갈래 줄기 간의 싸움으로 비유되는 양측 대결은 미국의 테러 참사로 일단 잠복했지만 머지 않아 다시 표면화할 것으로 보인다.


뜨거워지는 뿌리와 줄기 싸움

9월 8일 민주당 긴급최고위원회의.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로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명한 것을 놓고 최고위원들간에 찬ㆍ반 논란이 뜨겁게 벌어졌다.

과거 여당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한광옥 대표 카드' 반대에 총대를 멨다. 김 최고위원은 "현 정국에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 대통령 참모 역할을 했던 청와대 비서실장이 바로 당 대표로 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대표 지명에 대한 재고를 요청했다.

김 최고위원은 9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당 운영을 좌지우지하는 특정 계보를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특정 계보'는 물론 동교동계를 뜻한다. 지난해 12월 정동영 최고위원의 '권노갑 2선 후퇴' 주장, 지난 5월 말의 소장 개혁 그룹의 '정풍 운동'에 이어 김 최고위원이 민주당 창당 이래 세 번째로 동교동계를 향한 맹공에 나선 것이다.

10일 민주당 임시당무회의에서 한광옥 대표 인준안은 140여분간의 진통 끝에 통과됐다.

논쟁이 벌어진 뒤 표결이 벌어졌는데 당무회의 참석자 61명 중 6명만이 '인준 연기'를 주장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즉각 인준' 에 손을 들었다.

이날 권노갑 전 최고위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동교동은 당의 뿌리이다. 뿌리를 없애면 나무가 살 수 없다. 어려울 때 자기만 살려고 당을 흔들면 안 된다"고 말하며 김 최고위원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총선과 최고위원 경선 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툭하면 동교동계를 걸고 넘어진다"며 김 최고위원 등을 겨냥했다. 심지어 동교동계 일각에선 "김 최고위원이 장관직을 희망하다 뜻대로 안 되자 동교동계를 공격하는 것"이라는 험담까지 나왔다.

김 최고위원은 11일 오후 민주당사 기자실에 들러 기자간담회를 갖고 "그 동안 특정 계보 해체를 주장했으나 오늘부터는 직설적으로 동교동 계보의 해체를 주장한다"며 동교동계에 대한 재반격에 나섰다.

김 최고위원은 "과거 군사권위주의 정권 때 군대 내에서 하나회가 역기능을 했는데 동교동 계보가 민주당의 하나회가 돼선 안 된다"며 동교동계를 '하나회'에 비유했다.


동교동계, 소장·개혁세력의 타깃

동교동계는 김근태 최고위원 등 당내 쇄신파와 명분 대결을 벌이면 일단 불리한 입장에 서는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직계 세력인 동교동계는 '국민의 정부' 출범 초만 해도 '정권교체의 전위대'로 평가 받았다.

△ 기자회견을 갖는 김 최고위원과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개인사무실 개소식 모습. <손용석/사진부 기자>

하지만 임기 후반부로 들어선 뒤 여권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1차적 책임자로 지목됐고, 당내 소장ㆍ개혁 세력의 타깃이 돼왔다. 또 정당정치에 대한 국민 불신으로 현상 유지 차원에서 당 운영을 주도해온 동교동계는 여론의 비판을 받게 돼 있다.

그럼에도 동교동계는 세력관계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다. 동교동계는 민주당 현역의원 118명 가운데 20여명의 직계 의원을 확보하고 있고, '범 동교동계' 의원 40여명을 포함 절반 이상의 의원을 영향권에 두고 있다.

요즘 동교동계는 권노갑 전 최고위원 중심의 구파와 한화갑 최고위원 중심의 신파로 나눠져 있지만 이들은 동교동계와 김 대통령에 대한 공격 앞에선 일단 손을 잡는다.

신파는 종종 쇄신파와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번 대표 인선 문제에서도 결국 김 대통령 의중에 따라 '한 대표 체제 정착'을 돕는 위치에 섰다.

현역의원 중에는 김옥두 이훈평 윤철상 조재환 박양수 김방림 전갑길(이상 구파) 한화갑 문희상 설훈 배기운 조성준 (이상 신파) 최재승 김홍일 정동채 김덕배(이상 중도) 의원 등이 동교동 직계로 분류된다.

직계 의원에다 안동선 정균환 이협 박광태 이강래 정세균 장성민 의원 등을 포함한 '범동교동계' 의원은 40여명선이다. 동교동계는 이밖에 공천 및 당직 인선 과정의 영향력 행사 등을 통해 상당수 의원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대표 지명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은 동교동계 구파는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 중 한 사람인 이인제 최고위원 진영과 사실상 연대 관계로 진입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구 국민신당 출신 및 충청권 출신을 중심으로 한 10여명의 직계 의원을 포함해 20~30명의 '친 이인제' 의원을 확보하고 있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대선주자는 대표가 돼선 안 된다'는 논리로 '한화갑 대표론'에 강력 반대했지만 '한광옥 대표론'에는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았다.

한광옥 대표는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부터 동교동 구파와 협조 체제를 유지해왔다.


김근태 명분 얻는 대신 고립

김근태 최고위원은 명분에서 우위에 있다. 과거 1970~80년대를 거치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그가 당내 민주화를 주장하는데 대해 "다른 정치인과 달리 일관성이 있는 행동"이란 평가가 적지 않다.

물론 일각에 "대선 후보 경선 정국을 앞두고 동교동계 때리기를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것"이라며 정치적 사심을 거론하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명분론을 뒤덮을 정도는 아니다.

김근태 최고위원은 "나는 그전부터 일관되게 여권 '빅 3'의 교체를 주장해왔다. 과거 경선 때 동교동계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가장 많이 지원한 후보는 다른 사람 아니냐"며 순수한 동기를 강조했다.

그러나 김 최고위원은 세력 관계상 "고립됐다"는 표현이 적절한 정도로 절대 열세이다. 우선 한광옥 대표 지명 반대에 앞장섰던 개혁 성향 초선 의원 그룹인 '새벽 21' 내부에서도 "분란이 확대되면 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다.

한 배를 탔던 재야 운동권 출신 의원들도 내놓고 김 최고위원을 지원할 움직임은 없다.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개혁세력연대'의 파트너로 거론돼온 노무현 상임고문 마저도 한광옥 대표 지명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노무현 상임고문이 한 대표 인준을 지지한데 대해 김 최고위원은 "노 고문과의 전화에서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얘기하고 나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면 동교동계는 당내 세력을 확대해 김 최고위원을 포위하려 하고 있다.


대선후보 경선과정서 2라운드 펼칠 듯

각각 '세력'과 '명분'을 최대 무기로 삼아 대결하는 동교동계와 김 최고위원이 어떻게 2라운드 게임을 펼칠지 주목된다.

김 최고위원이 아닌 다른 소장 개혁 세력이 대타로 나서 동교동계와 일전을 벌일 수도 있다.

만일 대선 후보 경선이 본격화해 동교동계신파ㆍ 구파가 다른 길을 걸을 경우 동교동계 구파와 당내 쇄신파의 대결은 민주당을 요동치게 만들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교동계는 분열되지 않을 경우 내년에 대선 후보가 선출될 때까지는 당내 최대 주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광덕기자

입력시간 2001/09/19 17:04


김광덕 kd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