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와 길흉화복] 태봉(胎峰)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당과는 달리 태봉이란 명당이 있다. 아기가 태어날 때 갖고나오는 태(胎)에는 그 인간과 동기(同氣)가 흐른다 하여 우리 조상들은 태를 귀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태를 명당을 찾아 묻기도 했으며, 출산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에 왕겨에 묻어 태운뒤 재를 강물에 띄어 보냈다. 서민들은 태를 짚에 싸 강물에 버리기도 했다. 40대 중반 이상 세대들은 어릴 적 냇가에서 목욕을 하다 간간히 접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조에는 왕가의 후덕이 먼 지방까지 파급효과를 가져다 준다는 믿음에서 왕자의 태를 태우지 않고 항아리에 담아 이름난 명당을 찾아 안치했다.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이나 인근 마을을 풍수지리에서는 태봉(胎峰) 또는 태장(胎藏)이라고 부른다.

이 태봉이 있는 마을 주위를 우리 조상들은 성지(聖地)로 생각하고 잘 가꾸어 보존한 반면 일제 때는 민족정기 말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태봉이란 지명이 표기된 곳은 풍수지리상 거의 대부분 명당들인데 남한에만도 20여개가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경기도 연천군 죽면 태봉마을, 강원도 원주시 태장마을,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전북 익산시 삼기면 태봉리 등이다.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유명 명당을 찾아 쓴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첫째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동기감응론 효과를 받자는 것이다.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無病長壽)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믿었다.

또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도 있었다. 이와 함께 왕조의 은택(恩澤)을 일반 백성에게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 즉, 왕조와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왕릉은 도읍지 100리 안팎에 모셔진데 반해 태실은 전국의 도처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었다.

따라서 왕조에서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고 자연히 백성들은 왕족의 태실을 자기 마을 부근에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일제가 전국의 수많은 태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마구잡이로 모아 놓은 것도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조선의 멸망을 확인시켜 주자는 의도에서였다.

일제가 전국의 많은 태실을 강제 철거한 까닭에 현재 태봉이란 지명을 갖고 있을지라도 원래 안치된 태봉이 그 자리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봉은 경북 성주군 월한면 인촌동 선석산에 있는 세종대왕 아들의 태실이다.

명당은 어머니의 자궁안에 자라는 태아에 비유할 수 있는데 이곳 태실 명당은 선석산주봉에서 한줄기 내룡이 죽 뻗어 내려와 어머니의 두 다리는 청룡 백호가 되고 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자궁 격이 곧 혈이 된다.

선석산 주봉에서 태실이 안치된 이곳 혈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는 탯줄에 비유할 수있다. 태아는 탯줄을 통해 어머니의 태반에 연결되는데, 이 명당은 선석사라는 절 뒤에서 바라보면 탯줄에 연결된 태아와 같은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현대인들은 태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몸에 좋다며 식품으로 삼기도하니 안타깝다. (02)529-5725

수경 최전권(수경철학원 원장)

입력시간 2001/09/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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