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77)] 홋카이도(北海道)

일본 열도의 가장 북쪽에 자리잡은 홋카이도(北海道)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별한 곳이다. 해외 여행이 성행하기전까지 제1의 수학여행 후보지로 꼽혔으며 지금도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교토(京都)나 나라(奈良)와 달리 오래된 역사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닌 홋카이도의 인기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좀체로 느끼기 힘든 이국적 정경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개발이 시작된 삿포로(札幌)나 하코다테(函館), 오타루(小樽) 등의 도시에 남은 유적에서는 당시 유럽의 분위기를 살짝 느껴볼 수 있다.

드넓은 평원과 목장이 펼쳐지고 드문 드문 외딴집이 자리잡은 농촌의 모습도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수 없다. 자동차로 몇시간을 달려도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곳도 많아 작은 섬나라라는 일본의 고정된 이미지가 흐려진다.

홋카이도산 농산물은 감자나 밀, 야채, 꽃, 우유에 이르기까지 특별 취급을 받는다. 사방의 무공해 바다에서 나오는 어패류와 해초 등 수산물도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는다. 남한 면적의 80%에 이르는 섬 전체가 무공해 농수산업 기지로 기능하고 있다.

이 모두가 일본의 역사 판도에 가장 늦게 편입된 데 따른 축복이다. 홋카이도에 일본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의 일이었다.

앞서 바쿠후(幕府)도 홋카이도에 거점을 설치했지만 오랫동안 파견대의 군사적 거점이었을 뿐 통치·행정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시작된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을 연상시키는 것이자 한반도 이전에 홋카이도가 일본 최초의 식민지가 됐다고 볼만한 내용이었다.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밀려난 자리에는 일본 전국의 농민들이 옮겨 와 정착했다.

이들은 홋카이도 곳곳에 출신지별로 정착해 '기타고베'(北神戶) 등 고향의 이름을 남겼다. 이들이 혹독한 추위와 싸워 농경지를 개간하고 농작물을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은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우리의 간도 개척과 닮았다. 정부 조직에 홋카이도 개발청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홋카이도 개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있다.

개척과 식민이 시작되기 이전 홋카이도는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렀다.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오랑캐로 여겨온 '에조'의 땅이란 뜻이니 일본의 영역이란 인식 자체가 없었다.

'에조'는 특정의 종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일본이 고대국가 체제가 정착한 7세기 중반 당시 중앙 권력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던 현재의 간토(關東)·도호쿠(東北)·홋카이도 등의 사람들을 멸시해 '에미시'라고 불렀다.

'에미스' '에비스'로도 불렸으며 한자표기는 처음 '털북숭이'(毛人)가 쓰였다. 중화사상의 영향으로 오랑캐의 개념이 싹튼 데다 '에미·에비'가 새우를 가리키는 일본 고유어와 통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한자가 채용됐으며 10세기 이후에는 명칭이 '에조'로 통일됐다.

일본의 역사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에조'의 땅은 점점 좁아져 홋카이도와 도호쿠지방에 한정되면서 '에조'는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아이누족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아이누족은 일본 역사상 최후의 오랑캐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이누족을 오랑캐로 보는 시각은 일본인의 자기중심적인 시각일 뿐이다. 수렵·채취 경제에 의존한 아이누족은 고유의 문자는 없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었다.

또 최근의 연구 결과 이들이 일본 역사의 막후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지혜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현재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에 2만8,000여명이 살고 있으며 일본 전체에 모두 3만명 정도만이 남아 있다.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미국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정복되는 과정에서 대규모 희생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또 홋카이도의 농경지 개발로 전통적삶의 기반인 숲이 줄어 든 것도 인구 감소의 주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이누어로 '사람'을 뜻하는 '아이누'는 마지막 근거지였던 홋카이도에서도 전체 인구의 5%에 지나지 않게 됐다.

그나마 홋카이도의 지명 약 90%가 아이누어 발음을 살리고 있어 옛 주인의 흔적을 남겼다. 노보리베쓰(登別)·소베쓰(壯瞥)의 '베쓰'는 강, 삿포로나 놋포로(野幌)의 '호로'는 많다·넓다, 도카치(十勝)는 젖가슴이라는 뜻이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9/26 16:1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