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책의 바다에 빠진 가을

주위에 볼 것, 즐길 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세상이다.

클릭 한 번으로 문명충돌이 빚어내는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온갖 정보를 내 컴퓨터 안으로 당겨 아무 때건 꺼내 볼 수있다. 이 시대, 언어는 토크 쇼와 개그 콘서트에 잠식당했다.

△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다. 사이버가 난무하는 세상. 한권의 책으로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김명원/사진부 기자>

가을이다. 내팽겨쳐 두었던 내면과의 대화가 그립다. 책과의 대화, 독서는 대화의 변증법을 복구해 줄 것이다. 더욱 성숙한 삶으로 인도해 줄, 올 가을 따끈한 신간을 추천한다. 가을은 여전히, 독서의 계절이다.


등대지기
/조창인 지음, 밝은세상刊

외딴섬 구명도에서 8년째 등대지기를 해 오고 있는 재우에게, 어느날 노모가 찾아온다. 그토록 아끼고 떠받들던 맏아들에게서 버림 받은 것. 치매 때문이었다. 재우는 혼란스럽다.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형에게서 받았던 상처와 모멸감이 스물스물 살아났다.

자칫 감상적이고 통속적으로 흐르기 쉬운 소재이지만, 조창인씨의 입심은 여전하다. 2000년, 독서계를 뜨겁게 했던 화제작 ‘가시고기’의 지은이 아닌가. 부성애를 주제로한 ‘가시고기’와는 또 다른, 작가의 섬세함을 느낄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타우노 일리루시 지음, 마당넓은 집刊

“하느님! 하루만,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 핀란드작가 타우노 일리 루시의 자전적 이야기다.

정년 퇴임 후, 교외의 아파트에서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토르는 어느날 아내가 암에 걸려 6개월밖에 살지 못 한다는 선고를 받는다. 그는 그제서야 아내 없이는, 자신의 일상이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둘은 약속한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음을 속이자고.

토르는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사 모으면서 집안을 꽃으로 장식하거나, 유서를 써 갔다. 그러나 그는 결행을 하루 앞두고 심장 발작을 일으킨다. 그는 마지막 안간힘으로 기도를 올렸다.

마지막날, 그는 입원중인 아내를 몰래 빼내 집으로 데리고 간다. 아내에게 벅찬 행복이 밀려왔다. 토르는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둘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서로 꼭 껴안는다. 라디오에선 조용하게, 음악이 흘러 나왔다.


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문학동네 刊

그녀, 오산은 한 번도 꿈에 다가서보지 못 했다. 아버지는 아예 없었고, 어머니는 자신과 늘 따로였다. 글을 쓸 수 있는 넓은 방을 갖고 싶다는 꿈을 접고, 화원 종업원으로 취직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던 그녀.

자신의 눈썹에 반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는 사진작가에게 순결을 주고,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남자의 회사가 바라보이는 공터에서 남몰래 바이올렛 한 포기를 꾹꾹 눌러 심고 온다.

‘추억이 돼 주지 못 하고 파릇파릇한 슬픔으로 돼새김된 욕망, 그녀는 그 욕망을 껴안고 귓불이 붉어진 채 어둠속의 화원 안에서 길게 울고 있다’고 소설은 그녀의 절망을 이야기한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그 남자를 찾지만, 그는 오산을 기억하지도 못 한다.

언어와 이미지가 남발되는 이 시대, 그늘진 곳에서 정처 없이 떠 도는 가난한 영혼의 가슴 아린 이야기다. “혼신의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슴 먹먹한 감동”이라고, 소설가 박완서씨는 말했다.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조경란 지음, 문학과 지성刊

전생은 있다. 전생에 가졌던 인연은 어떤 식으로 현재의 자신을 규정할까?

부모와 오빠가 세상을 뜨고 외톨이가 된 강운이 정신과 의사의 집요한 권유로 전생 퇴행 요법을 받으며 겪게 되는 일이다. 그 워크숍에 참가한 인물들과 강운 사이에 오가는 내밀한 심리묘사가 주축이다.

의료 사고로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산부인과 의사 서휘경, 까닭 모를 어깨 통증에 시달리는 여인 하선, 교통 사고로 아내를 잃어 버린 박치원 등 세 참가자의 운명과 강운이 얽혀 들어가는 모습은 독자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첨단 과학의 시대에 듣게 되는 운명과 영혼, 전생 등 색다른 이야기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김진명 지음, 해냄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의 깊숙한 내전에서 일본 낭인이 저질렀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가려진 진실을 추적한다. 명성황후의 시신이 불태워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건 관련보고서가 106년 동안 일본 외무성 문서고에 은밀히 감춰져야만 했던 이유는?

일본의 비도덕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소설은 일본의 습관적 역사왜곡 작태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아닐까?

베스트셀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금융 대란과 함께 찾아 온 우리의 정신적 위기를 다룬 ‘하늘이여 땅이여’, 인터넷의 음모를 파헤친 ‘코리아 닷 컴’ 등 문제작을 줄지어 발표해 온 작가의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인다.


수수밭으로 오세요
/공선옥 지음, 여성신문사

가난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단련시키는가. 극도의 가난속, 오지랖 넓게 펼쳐지는 모성의 힘을 보자. 좌절할 지라도 끝까지 버텨내는 공선옥씨 특유의 여성 주인공이 다시 힘을 낸다.

가난한 시골 농사꾼의 딸로서, 몸뚱이 하나만이 재산일 뿐인 강필순의 삶을 들여다 본다. 그녀는 두 번 결혼한다.

한번은 농사꾼, 다음은 이혼한 의사. 그것만 해도 벅찬데, 그녀에게 딸린 아이는 모두 다섯. 구로공단에 살 때 알게된 친구가 병사하면서 남긴 두 딸, 한때 그녀의 여동생 필례와 동거했던 남자가 어느날 맡기고 간아이까지 피붙이로 모두 떠안은 그녀.

그녀의 삶은 이 강퍅한 시대, 무엇을 말하는가? “죄 없는 저 어린 것들을 누가 미워할 수 있을 것인가. 추위와 배고픔과 슬픔 속에 빠뜨려 놓고, 누가 마음 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숭고한 모성의 힘을 읽는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김영사刊

창작 생활 13년만에 처음으로 쓴 기행 에세이다.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독일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수도원을 여행하며 느낀 감상들을 모았다.

베네딕트 여자 봉쇄수도원, 테제의 테제 공동체, 마리엔하이데의 몽포뢰 도미니코 수도원 등지의 비경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의 문장력으로 펼쳐져 있다.

그 성지들을 찾는 여정은 자신의성장기를 되돌아보는 심리의 궤적이기도, 자신이 경험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기도 했다.

이 여행수상록은 최근 18년만에 카톨릭으로 다시 돌아 온 작가의 내밀한 고백록이기도 하다. 전투적 투사, 공지영의 첫사랑, 열혈 신학생 시절, 투쟁의 시절 등이 오늘날의 유럽풍광과 함께 펼쳐지는 독특한 기행문집이다.


헬렌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니어링 지음, 디자인하우스刊

요리의 시대다. 그러나 미식은 탐식을 조장할 뿐이다. 언론의 부추김에 떠밀려, 탐식에 길들여져 가는 우리를 일깨워줄 책.

육류, 생선은 물론 흰설탕, 흰밀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볼 수 없다. 대신 신선한 야채와 과일, 건강에 좋은 곡물로 만드는 간소하고 맛 있는 음식이 한상 그득하다.

아침식사(breakfast)로 금식을 깬다(break fast)?, 활력을 주는 야채, 빵은 무거운 음식이다, 먹거리를 보관하고 저장하는 법, 허브와 양념 등.

저자 헬렌 니어링은 남편 스코트니어링과 함께 1932년부터 버몬트의 낡은 농가로 들어가 ‘조화로운 삶’을 시작, 모두 백세를 누렸다.


상도
/최인호 지음, 여백刊

조선 후기의 무역왕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 소설. ‘상업도 도’라는 신념을 실천한 삶을 그렸다. 기평그룹의 총수 김기섭 회장의 죽음을 단서로, 임상옥의 삶에 빠져 들어간 작가의 이야기다.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교직해 나가는 이야기꾼 최씨의 테크닉이 인상적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9/27 17:45


장병욱 주간한국부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