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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호리에…피도 눈물도 없었다

'잘린'호리에…피도 눈물도 없었다

제일은행장 전격 상실, 경영책임론 "주도권 상실" 시각도

뭔가 다르긴 달랐다. 흘러간 한국 액션영화라면 주인공이 누군가를 혼내줄때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둘이 피범벅이 되도록 치고 받고 싸운다. 그러다가 둘 다 힘이 부치고 기진맥진해서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마침내 주인공의 '카운터 펀지'가 날아가는 법이다.


호리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뉴브리지캐피탈과 월프레드호리에와의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황홍이 다가왔을때, 뉴브리지는 일발필살의 탄알을 날렸고, 호리에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건 한편의 '하드보이드 마카로니 웨스턴'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니 그렇다.

10월 23일 오전 제일은행 노동조합이 윌프레드 호리에 제일은행장의 사퇴설을 흘렸을때만 해도 한국은행 기자실에 있던 대부분 금융단 출입기자들은 긴가민가하는 상태에서 사실확인을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전화버튼을 눌러댔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고, 딱히 감조차 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중은행장이 중도하차 한 경우는 흔지 않지만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예는 해당 인사가 도하 신문의 1면을 며칠동안 도배할 만한 큰 비리에 연루돼 조만감 감옥으로 직행할 경우거나, 정권이 바귄다거나 해서 '알만한 사람'들은 대개 예상했거나 하는 정도였다.

이도 저도 아닌 중도하차라니…금융단 기자들이 허둥거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여부는 곧 확인됐다. 제일은행측은 곧이어 '호리에 행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자진 사퇴했으며, 후임에 프랑스 국적의 국제금융 전묵가인 로버트 코엔(Robert A. Cohen 프랑스인이라 표기법을 두고 논란이 있었느나, 개인의 이름은 점을 감안해 제일은행측의 요청에 따른 것임) 제일은행 비상임이사가 내정됐다'는 내용의 팩스를 기자실에 보내왔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무엇보다도 호리에 행장은 내년 2월까지만 버티면 지난해 1월 취임 당시 받았던 412만8,7775주의 스톡옵션을 행사(행사가격 9,438원)할 권한을 갖게될 입장이었다. 제일은행 주식이 언젠가 2만원 선에 도달한 경우 줄잡아 200억원이 넘는 차익이 기대되는 권리이다.


사퇴 배경 분석…맞은 것과 틀린 것

대체 무엇이 호리에 행정으로 하여금 4개월여만 버티면 거머쥘 수 있는 막대한 이권을 포기하게 만들었을까. 또 사퇴는 자의적이었을까, 아니면 사실상 경질이었을까. 각 신문사들은 해설기사의 초점을 여기에 맞췄다.

정황상 사퇴는 제일은행 최대 주주인 뉴브리지에 의한 '사실상 행장경질'인 것으로 일찌감치 모아졌다. 그럼 왜 경질됐을까.

우선 제일은행의 최대 주주(51%)이자 당초 호리에 행장을 임명했던 뉴브리지캐피탈이 최근 제일은행에 대해 자체 검사를 실시한 사실이 감안됐다.

제일은행 주변에서는 "호리에 행장 재직 기간에 2,700억원으로 불어난 하이닉스반도체 여신과 흥창 부도에 따른 여신의 추가 부실화 문제 등이 감사에서 지적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호리에 행장은 최근 국내 은행 일부도 머뭇거린 하이닉스 추가 지원 문제에 대해 비록 개인적이었지만, 추가 지원 방안을 지지한다는 의외의 입장을 밝히는 등 '튀는 행동'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일종의 미국계 투기자본인 뉴브리지가 하이닉스 지원 문제에 대해 호리에 행장의 입장에 반대했기 때문에 경질을 단행한 것으로 분석했다.

사태의 뿌리를 제일은행 내의 인적갈등에서 찾는 시각도 나왔다. 제일은행 사정에 정통한 한 증시 애널리스트는 "은행에서 여신 부실화는 늘 있게 마련"이라면 "몇몇 여신의 부실화가 문제가 됐다기보다는 구체적 경영 스타일이나 방침을 둘러싸고 야기된 경영진 간의 주도권 투쟁에서 호리에가 밀린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호리에 행정이라는 최고 경영자의 대척점에 뉴브리지가 직파한 제일은행 이사들간의 갈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얘기다.

제을은행 관계자 역시 "수개월 전부터 호리에 행장이 (경원권 행사에서) 밀리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 초 모외국계 보험사의 경우 최고 경영자가 부하 임원과의 갈등에서 밀려나 갑자기 토임한 경우도 있다.

호리에 행장이 우리 정부의 이른바 '관치금융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했고 노조 문제에도 끌려갔기 때문에 뉴브리지측이 행장 경질에 통해 당국가 노조등에 일종이 메시지를 던진 적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밖에 뉴브리지가 제일은행 지분을 조기 매각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얘기도 나왔고, 호리에 행장이 주도했던 소매금융의 실적이 저조했기 때문에 기업금융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로버트 코헨이사를 신임행장으로 앉혔다는 얘기도 있었다.


결국은 경영 성과가 사퇴의 배경

하지만 이번 사태가 가라앉은 뒤 느닷없이 스며드는 느낌 하나는 이 모든 분석과 시삭들이 한편으로는 맞지만, 한편으로는 헛다리를 짚은 것 같다는 것이다. 맞은 점은 이 모든 개발적 사실들이 호리에 행장의 경영 부진을 초래했거나 그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 헛다리를 짚은 대목은 제일은행 경영 부진의 내용이 호리에 행장 취임후 지난해 6월부터 1년간 제일은행 고정이하여신(부실여신의 기준점) 비율이 0.25%에서 2.18%로 증가했다는 점, 제일은행 직원 1인당 충당금 적립전이익이 380만원에서 360만원으로 떨어졌다는 점, 1개 영업점 당 예수금도 6억3,700만원에서 5억2,900만원으로 하락했다는 단순하고 객관적인 내용을 누구도 두드러지게 짚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리에 행정은 23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스톡옵션을 받을 만큼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자인하고, "스스로 사임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자본과 자본의 속성을 터득한 자간의 게임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사태의 정황은 좀 더 또렷해진다. 그건 사두에서 언급한 '하드보일드 웨스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뉴브리지는 자체 검사를 통해 호리에 행장이 당초 약속했던 일정 수준(연말 당기순익 규모 2,600억원이라는 설이 있음)의 경영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리고 호리에 행장에게 이사회를 통한 경질과 자진사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던졌을 것이다. 물론 호리에는 사퇴를 '스스로 결정'하는 쪽을 택했을 테고….

'하드보일드 웨스턴'. 굳이 번역하자면 '비정한 서부극'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뉴브리지와 호리에 행장은 톱니처럼 정교하게 가해지는 '자본의 힘'과 그 힘에 복종하는 방식을 터득한 '세련된' 경영인간의 비정한 액션을 보여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입력시간 2001/11/0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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