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사람들](24) 서울대 물리학과 노태원 교수(上)

“학생들이 큰 힘이죠.”

서울대 물리학과의 노태원(44) 교수는 유별날 정도로 학생들과 가깝게 지낸다. 노 교수는 1999년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인 F램 신물질 비스무스 란타늄 타이타늄(BLT)을 개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물리학자다.

“서울대의 유일한 무기는 우수한 학생입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인프라나 재정지원은 선진국의 유수한 대학에 못 미칩니다. 반면 학생들의 잠재력은 세계어디에 내다 놓아도 밀리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신바람이 나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학생도 성장하고, 학교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신바람나는 연구풍토 조성 필요"

노 교수는 일주일에 최소한 3번 이상 학생들과 저녁을 함께 한다.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곧잘 학생들과 산에도 오른다. 푸근한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아량이 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노 교수가 큰형님 같다고 한다.

노 교수가 학생과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단순한 사제지간의 의무감이나 호인풍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89년 물리학과로 돌아왔는데 그 당시 제가 받은 느낌은 황량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에 대해 관심이 90년대들어 서서히 커졌지만 당시만 해도 썰렁했습니다.

또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자재는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방 하나 덩그렇게 있는 수준이었죠. 외부분들은 ‘서울대가 그럴리가 있느냐’고 믿기 힘들다고도 하셨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게다가 학생들도 문제였습니다. 한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서울대가 한국에서 최고이니까 우리가 한국에서 최고다’라는 생각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무관심, 기자재 부족, 안주하는 학생 등 3대 문제를 학생에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80년대 민주화 열풍 여파로 정치적 문제에 골몰하고 있던 학생들이 이제는 연구에 빠져들 수 있도록 ‘선동’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제 상대는 세계다. 여러분들은 세계와 경쟁을 해서 이겨야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말로 깨우쳐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산행도 하고, 소주잔도 나누게 된 것입니다.”

노 교수는 이러한 ‘스킨쉽’을 토대로 학생들에 대한 동기부여에 나섰다.

“처음 저가 부임했을 때는 기자재가 없었지만 지금은 우리 연구실에는 기계가 5대나 있습니다. 이중 3대는 저와 학생들이 만든 것이고 나머지 2대는 산 것입니다.”

노 교수가 말하는 ‘기계’는 장난감이 아니다. 레이저 광선을 고체에 쏘아 고체의 성질을 파악하는 고체분광기 등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실험용 장비들이다.

“이런 기계를 기술자도 아닌 학생들이 어떻게 만들 수있으며, 만든다고 한들 제대로 작동하겠느냐구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죠. 처음에 직접 만들겠다고 하자 다른 선생님들도 실패할 것이라며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하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돈이 있었다면 그냥 구입해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자재는 있어야겠고, 돈은 없고. 어떤 기계는 만드는데 3년이나 걸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해냈습니다.

더구나 운이 좋아서인지 만든 기계들이 지금도 작동이 잘 됩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우수한 학생들에게 신이 나고 재미있는 일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고체분광학은 주파수를 넓게 볼수록 유리한데 우리 연구실은 학생들이만든 기계 덕에 웬만한 연구소에 지지않을 정도로 넓은 영역을 커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시 기계제작에 참여했던 한 학생은 기계부품을 사러 서울 구로동 기계상가를 워낙 자주 찾아가는 바람에 기계상가의 상인들은 이 학생을 철물점 직원으로 생각했다.


기계 직접 제작, 연구인프라 구축에 주력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했는데 지도교수에게‘고국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했더니 엉뚱하게도 기계를 직접 만들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에 비해 과학 후진국이던 미국이 초선진국으로 급부상한 원동력이 바로 기계제작이었다고 설명하더군요. 좋은 기계와 유럽에서 건너온 고급두뇌, 미국 대학이 키운 학생들, 미국의 인프라 시스템 등이 융합하면서 급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말이 된다고는 생각했지만 돌아와 정말로 기계를 만들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고대 로마신화에 나오는 포르투나(Fortuna)라는 행운의 여신은 앞머리는 길지만 뒤는 대머리입니다. 기회의 여신이 다가올때 그 긴 머리를 잡지 못하면 지난 후에는 잡을 수 없습니다.’

학생들의 연구의욕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이런 그의 열성 때문인지 그와 그의 제자들은 BLT 관련 논문이 세계적인 과학잡지인 네이처에 게재된 것을 비롯 세계적인 물리학전문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에 국내에서 최초로 4편의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무척 귀중하게 여긴다. 특히 외국논문에 의존하거나 이미나온 연구를 답습하는 것을 경계한다. 기초과학의 생명은 새로운 것에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76년 서울대 이공계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공대 학과를 택하려 했던 그가 자연대 물리학과로 돌아선 이유도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당시 이공계는 지금의 자연대와 공대가 합쳐진 대계열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학과 기계를 좋아해 저 자신이 공대 체질이라고 생각했죠. 또 70년대는 기술입국을 한창 강조하던 때 아닙니까.고등학생 때 적성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들었구요.

그런데 대학을 들어온 뒤 회의가 일기 시작하더라구요. 제 스스로를 관찰해보니까 이미 만들어진 결과보다는 결과가 나오게 된 원리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공대 대신 물리학과를 선택했지만 30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뒤에도 공대에 여전히 미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전인미답인 탓에 엄청난 갑갑증을 유발하지만 규명을하고 나면 더 할 수 없는 희열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학생들이 기초학문에 진정한 재미를 붙일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할 수 있습니다. 연구도 재미가 있어야 제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국내박사에 대한 편견 사라져야"

그런데 그는 요즘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열심히 하라. 서울대에서 세계 최고가 되라’고 제자들을 고무하며 이끌어왔지만 정작 박사 학위를 받은 제자들이 국내 박사라는 이유로 미국 박사에 비해 상대적인 불이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30대에서 40대 초반이 가장 왕성하게 연구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 후 과정까지 한다면 이는 국가적 손실입니다.

국내박사와 외국박사가 똑 같은 연구성과를 냈다면 불리한 여건에서 연구한 국내박사가 더 우수한 것 아닙니까. 우수한 국내 박사가 외국에서의 연구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멀지 않아 국내박사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것”이라고 제자들을 위로 겸 독려를 하고 있다는그는 “유능한 국내박사를 우리 스스로가 존중하지 않는다면 대학과 학문의 발전은 그만큼 늦어질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11/0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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