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박을 쫓는 사람들] 주택가까지 파고 든 독버섯 사설 경마

조폭들의 신종사업, 자금줄로 급부상

10월20일 오후 3시30분 경기 수원시 권선구 모아파트 단지. 불법 사설 경마가 이뤄진다는 제보를 받은 한국마사회 고객 안전팀과 경기경찰청 기동수사대로 구성된 20여명의 합동수사팀이 은밀히 아파트 주변을 에워싸며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

그런데 이때 건물 밖에서 감시를 하던 일당 중 한명이 눈치를 채고 아파트 내부에있는 조직원들에게 휴대폰으로 경찰 출동 사실을 알렸다.

그는 이어 아파트 뒷편으로 달려가 9층에서 일당들이 던진 돈다발을 들고 도주를 시도했으나 잠복하고 있던 경찰에 곧바로 체포됐다. 합동 수사팀은 이 범인을 앞세워 아파트에 진입, 거액의 판돈을 걸고 불법 사설 경마를 하던 13명을 검거했다.

그러나 이미 경마 예상지, 마권, 메모지 같은 증거물들을 모두 소각한 뒤 세탁기에 넣어 돌리는 등 모든 증거를 인멸한 상태였다. 54평인 이 아파트 내부에는 경마 중계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초대형 프로젝션 TV와 배팅률을 확인할 수 있는 컴퓨터 등이 있었다.

경찰 수사 결과 이들은 수원 남문파조직 폭력배들로 20여명의 경마꾼들을 모아 하루에 수억원대의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 아파트 주민들은 건장한 체격의 수상한 사람들이 오가는 데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부들까지 ‘경마내기’

불법 사설 경마가 독버섯처럼 마구번지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주로 경마장이나 마사회 직영 장외 발매소 주변에 일부 성행했던 불법 사설 경마가 이제는 일반 상가나 오피스텔, 심지어는 아파트 같은 일반 주택가에까지 침투했다. 일부지만 일반 가정에서 주부들까지 경마 내기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법 사설 경마가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올해 초부터 한 케이블TV가 경마 경기를 생중계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마사회법상 불법으로 돼 있는 사설 경마는 이미 오래전부터있어 왔다.

하지만 주로 과천과 제주 경마장이나 전국의 마사회가 운영하는 장외 발매소에서 몇몇 경마 꾼들이 자기들끼리 내기를 걸고 하는 소위 ‘마때기’가 주를 이뤘다. 3~4년전부터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사설 경마업자 총책에게 전화를 걸어 배팅을 한 뒤 나중에 정산을 하는 통신 구매 수법도 간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발각될 우려가 높고 돈을 떼일 위험이 높아 크게 성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2월3일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케이블 방송인 리빙TV가 주말 경마 전경기를 생중계하면서 이른바 ‘유선방송 경마 하우스’라는 불법 사설 경마에 불을 붙인 꼴이 됐다. 이 경마 하우스는 케이블 TV와 컴퓨터 한대만 있으면 마사회 장외 발매소와 똑같이 경마를 즐길 수 있는데다 개설도 간편하고 사법 당국에 적발될 위험도 적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3달만에 50억 버는 ‘돈방석’ 경마하우스

사설 경마 하우스는 손쉽게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조폭들의 신흥 사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경마 자체가 우승 말을 맞추기 힘들어 하우스에게 무조건 승산이 있는 경기인데다,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꾼들은 점차 늘어 사설 경마 하우스만 차리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단속에 적발된 사설 경마 하우스 운영자들 대부분이 폭력배들을 끼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10월 21일 검찰은 마포구 서교동과 모오피스텔에서 유선방송 경마하우스를 불법 운영한 자금책 박모(39)씨등 4명을 검거했는데 이들은 3개월동안 210억원의 마권을 판매해 무려 50억여원의 부당 이익을 챙긴것으로 드러났다.

또 같은 날 강남구 논현동에서 사설 경마 혐의로 검거된 정모(45)씨 등도 1개월여만에 무려 30억여원의 부당 이득을 취득한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사설 경마 하우스는 조폭들의 새로운 자금줄로 급부상한 사업이다.

사설 경마 하우스는 대개 30~50평 규모의 사무실이나 오피스텔에 하우스를 차려 놓고 하루 억원대의 사설 마권을 판매해 거액을 챙긴다. 하우스는 외부에 감시 카메라와 감시원을 배치하고 문도 경찰 진입에 대비해 2중 철문으로 만든다.

일반인의 출입은 일절 금지되고 안면 있는 단골 고객들이나 이들이 추천한 사람들만 들어올수 있다. 입장 전에는 전화로 입장 여부를 알리기나 외부 감시인에게 사전에 통보를 해야 한다.

사설 경마 하우스는 사설 마권을 팔고 손님들에게 배당금을 주는 자금주와 현장에서 운영을 담당하는 총책으로 나눠져 있다. 자금주는 거의 배일에 가려진 채 외부에 나타나지 않고 주로 단속에 대비해 ‘바지’(대리인)를 전면에 내세워 하우스를 운영한다.

이 곳에 온 경마 꾼들은 하우스 운영자에게 돈을 주고 마권을 구입하고, 우승 말을 맞혔을 경우 하우스 업자로부터 배당금을 받는다. 다시 말해 하우스업자가 사실상 마사회의 일을 대신하며 그 수익금을 고스란히 챙기는 것이다.

경마장 처럼 정식 마권을 판매 하지 않고 주로 간단한 메모지에 자신의 배당 액수와 선택한 말을 적어 넣는 방식이 주로 사용된다.

경마 결과는 케이블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대형 TV 화면을 통해 확인한다. 배당금은 마사회가 인터넷을 통해 발표하는 것에 컴퓨터 화면을 통해 확인한 뒤 하우스 업주가 준다.

지난 4월에는 사설 경마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뿌리깊게 퍼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마사회 단속반은 경찰과 함께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식당에서 사설 경마행위를 한 일당 13명을 붙잡았는데 놀랍게도 범인들이 모두 시각 장애인이었다.

경마는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경기인데 시각 장애인들까지 경마 도박을 했다는 사실에 경찰은 아연 실색했다. 이들은 주로 안마시술소를 운영하는 업주들로 주중에는 젖가락을 이용한 소위 ‘장님 도박’을 하고 주말에는 경마로 하루 억대의 판돈을 건 경마 도박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각 장애인들이 촉각을 다투는 경마 내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사회가 제공하는 ARS 음성정보 서비스덕이었다.

이들은 하우스 운영자를 상대로 우승 예상 마에 돈을 건 다음 ARS 음성정보 서비스를 통해 경마 실황 중계 결과를 듣는 방법으로 내기를했던 것이다. 이들은 점자로 만들어진 경마 예상지까지 만들어 보았을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마사회법에 따르면 경마는 과천과 제주 경마장, 그리고 마사회 직영인 전국 25개 장외 발매소에서만 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 법에는 사설 경마 같은 경마 유사 행위를 했을 경우3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마사회측은 현재 불법 사설 경마 행위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총 경마액의 30%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올해 경마 총 매출액이 5조를 넘어설 것으로 계산해 보면 사설 경마 시장은 무려 1조5,000억원에 달하는 것이다.


레저ㆍ도박 양극화, 단속에 강한 의지 보여야

사설 경마가 이처럼 발호하는 데도 수사나 처벌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마사회에는 불법 사설 경마를 감시ㆍ적발하는 부서로 고객안전팀이 있는 데 인원은 불과 5명이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자체 수사권이 없어 반드시 검ㆍ경에 수사를 의뢰해 합동 작전을 펴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 국감서 한나라당의 지적으로 그간 불법 행위자검거 때마다 수사기관에 주던 인센티브제도가 없어져 최근 사법 당국의 협조가 미온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해까지는 마사회가 현행범 1명을 검거했을 경우 검찰이나 경찰의 해당 수사 기관에 30만원씩의 위로금을 지불했었다.

마사회 고객안전팀의 정재덕 과장은 “올해 들어 사설 경마에 대한 제보가 지난해의 두 배 이상 급증하는 등 급속히 확산되고 있지만 현행 인원으로는 효과적인 범인 색출에 한계가 있다”며 “사법기관에 전담 수사팀을 주거나 인센티브제를 재도입하는 방식으로 검거활동을 강화해야 늘어나는 사설 경마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양정식 경매 전문가는 “최근 경마장에는 가족과 젊은 층들이 많이 늘어 건전 레저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이는 데 반해 케이블 TV로 운영하는 불법 하우스는 점차 도박성이 강해지고 조폭들까지 개입되는 등 최근 경마가 양극화 돼 가고 있다”며 “사법 당국이 보다 강인한 의지를 갖고 불법 사설 경마를 뿌리 뽑는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08 16:20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