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박을 쫓는 사람들] "욕심갖는 순간 '말아먹기' 시작"

만화가 배금택이 본 경마·경마장·경마꾼

“경마요. 멋지게만 즐기면 이 세상의 모든 도박과 마약도 물리치게 하는 마력을 가진 스포츠이자 오락입니다.”

‘종마 부인’, ‘변금련뎐’ 등 유머와 위트 넘치는 성인 만화로 유명한 작가 배금택(52)씨는 스스로를 ‘경마꾼’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당뇨병으로 몸이 좋지 않은 요즘에도 배씨는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과천 경마장을 찾는다.

올해로 벌써 8년째다. 그는 집안의 큰 일이 있거나 병원 신세를 질 정도의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과천으로 향한다. 이미 그에게 경마는 취미의 수준을 넘어 생활의 일부가 돼 버렸다.

배씨가 경마를 접하게 된 것은 직업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1990년대초 스포츠지에 성인용 만화를 그려 공전의 인기를 얻었던 그는 당시 시민 단체들의 성적인 묘사에 대한 문제 제기에 1993년부터 다른 소재를 찾아 나섰다. 그 대안으로 그가 제일 먼저 눈을 돌린 분야가 도박이었다.

“당시 개인적으로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그럼 도박을 소재로 그려보자’고 마음 먹고 빠찡꼬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XX파라고 하는 한 조폭 일당이 압력을 가해 오더군요. 그래서 ‘그럼 국가가 공인한 도박을 하자’며 경마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 뒤로는 시민 단체가 아무 말도 안 하더군요. 사실 성인 만화 보다 더 나쁜 게 도박인데… 하여튼 결과적으로 이런 소재를 찾게 해줘서 한편으론 고맙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경마는 제 일부가 됐습니다”

배씨는 경마를 하는 데는 변하지않는 원칙 몇 개가 있다. 가급적 아내를 동반할 것, 절대로 과도한 금액을 갖고 가지 않을 것, 큰 돈을 따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가볍게 잃어 주며 경기를 즐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갈 것 등등이다.

배씨는 대략 30만원, 아내는 10만원을 들고 집을 나선다. 처음 경마장에 가자고 할 때 떨떠름해 하던 아내가 이제는 오히려 더 적극적이라고 배씨는 귀띔한다.

만화 취재를 겸해서 다녔던 처음 4년간은 거의 잃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연말 정산을 하면 ‘아내와 경기 후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한잔 할 정도’는 따는 편이다. 8년간의 노하우가 쌓이면서 제법 말을 고를 줄 아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경마의 매력은 다크호스 찾기

“경마의 진짜 매력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숨겨진 복병, 다시 말해 다크호스를 찾는 데 있습니다. 오랫동안 레이스를 관찰하면서 말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유심히 마음 속에 간직해 두는 것이지요.

이런 데이터를 장기간 연구ㆍ분석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때에 베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면 고배당이지만 느끼는 정신적 희열은 말로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배씨는 한번에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욕심이 경마꾼들을 망친다고 꼬집는다. 경마라는 것이 세밀한 연구ㆍ분석과 고도의 추리 게임 인데 경마꾼들은 한탕주의에 빠져 무모한 베팅을 한다는 것이다.

“경마의 묘미는 작은 돈을 걸고 높은 배당을 받을 수 있는 ‘다크호스’를 찾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경마꾼들은 이런 재미 보다는 목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가능성이 높은 쪽에 큰 돈을 걸기 때문에 낭패를 봅니다.

예를 들어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복병마를 찾아 1,000원을 걸고 500배를 기대하며 응원하는 게 경마의 진가입니다. 그런데 경마꾼들은 배당은 2~3배에 그치지만 우승 가능성이 높은 쪽에 100만원을 겁니다. 그러다 잘못되면 본전 생각에 다음 경주에는 더 큰 액수를 걸게 되지요. 바로 망하는 지름길이지요.”

경마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배씨에게도 적잖은 시련이 있었다. 처음 만화 소재를 얻기 위해 경마를 시작하면서 배씨는 자신도 모르게 경마에 빠져 들었다. 배씨는 교회의 집사를 맡고 있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일요일에는 예배가 끝나는 오후 늦게 경마장을 갔다. 그러나 경마에 점점 심취되면서 일요일에도 도저히 교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일요일에도 교회를 포기하고 경마장으로 달려가기에 이르렀다. 경마가 신앙심 마저 바꾼 것이다.


‘한몫’환상은 가산탕진의 지름길

배씨는 많은 경마꾼들이 가산을 탕진하면서도 경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한몫을 잡겠다는 환상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배씨도 몇 차례 이런 대박의 언저리까지 간 적이 있다. 1996년 2만원짜리 마권 5매를 구입해 무려 720배의 고배당을 맞혀 1,440만원을 쥔 적이 있고, 1997년에는 2,000원 짜리 마권 한장으로 1,220배의 우승 마를 찍어 2,440만원을 벌기도 했다.

물론 배씨도 한 때 영화사에서 계약금으로 받은 수백만원을 단 하룻만에 날린 아픈 기억이있다.

“어느 늦은 가을날 50만원을 잃고 경마장 정문을 나서는 데 주변 포장마차에서 닭발에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몹시 부러워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주머니에는 아침에 올 때 산 전철표한장 뿐이었지요. 어찌나 소주 한잔이 그립던지… 그 후 ‘돈을 따겠다고 와서는 안되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부담 안될 만큼 즐겨야 겠구나’ 하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배씨는 8년간 경마장을 다니면서 돈의 환상을 좇다가 ‘경마병’에 빠진 수많은 사람을 경험했다. 과천경마장 건립 때 땅을 팔아 수억대의 보상금을 받았다가 4년만에 고스란히 날리고 식당 종업원이 된 남자, ARS 전화 베팅을 하다가 분당의 아파트를 날리고 이혼까지 당한 한 법무사의 부인, 경마 브로커에 걸려 공금까지 횡령하다 쇠고랑을 찬 공무원 등 경마장 주변에는 허황된 꿈에 빠져 인생을망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고액세금 등으로 환급률 너무 낮아

경마에 베테랑이 된 배씨지만 국내경마 운영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다. 배씨는 정부가 겉으로는 경마를 건전 레저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도박세에 준하는 고액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마사회도 엄청난 수입을 내면서 손님들에 대한 기본적인 서비스를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경기도 재정으로 흡수되는 지방세 10%를 포함해 총 28%가 각종 세금과 마사회 운영비 명목으로 떼어져 나갑니다. 그러면서도 경마장에는 경마가 이처럼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 노인들이 앉을 경로석 하나 없습니다.

그러고도 정부는 경마가 레저 스포츠라고 떠듭니다. 차라리 경마장을 도박장으로 만들어 당당하게외국처럼 18~20%의 도박세를 받는 게 더 정당한 일입니다. 우리 경마는 환급률이 너무 낮습니다.”

당뇨 증세로 몸이 불편한 데도 경마장 레이스가 시작되면 “이 놈아 매우 쳐라”, “더욱 때려”하며 목청이 쉬도록 소리를 지른다는 작가 배금택씨. 그는 “경마는 욕심내지 말고 즐기는 게임”이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경마장에 갈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08 16:36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