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팔고, 팔면 사는 '진검승부'

기관·외국인, 주식시장서 정반대 매매패턴…최후의 승자는?

기관과 외국인이 주식 시장에서 진검 승부를 벌이고 있다.

9ㆍ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 이후 국내 기관과 외국인이 거래소 시장에서 서로 정반대의 매매 패턴을 보이고 있다. 기관이 팔면 외국인은 사고 외국인이 팔면 이번에는 기관이 사는 식이다. 일진 일퇴의 이번 승부에서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9월 외국인 순매도, 기관순매수

911 테러는 세계 주식 시장의 폭락을 불렀다. 우리 시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물 붕괴 15시간여가 지난 9월12일 낮12시 거래소 시장이 문을 열자마자 주가는 순식간에 무려 12%나 빠졌고 전날 540.57로 마감된 종합주가지수가 475.60까지 곤두박질쳤다.

이날 외국인은 무려 1,154억원 어치의 주식을 팔았다. 매수세가 없었기 때문에 외국인은 어쩔 수 없이 하한가에 물량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날 외국인이 하한가에라도 팔겠다고 내 놓은 물량을 집어간 투자가가 있었다.

다름아닌 바로 국내 기관들이었다. 투신, 은행, 증권, 보험, 연ㆍ기금 등의 국내 기관들은 외국인이 1,154억원어치를 판 이날 오히려 2,824억원 어치를 매수했다. 외국인 물량 뿐 아니라 패닉에 휩싸여 주식을 내다 팔기 바빴던 개인들의 매물까지 모두 고스란히 받아낸 것이다.

이날 승부는 그 다음날 바로 기관들의 승리로 결판났다. 외국인은 자신들의 반응이 너무 과민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고 9월13일 567억원 어치의 주식을 사 들였다. 반대로 이날 기관은 1,979억원 어치를 팔았다.

전날 하한가에 샀던 주식을 이날 주가가 오르자 팔아버린 것이다. 주가는 이날 499.25까지 반등했다. 시장의 패닉에 외국인은 순진하게 대응했고 노련했던 기관은 하루만에 막대한 시세 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9월12일과 13일의 매매공방은 사실 이후 펼쳐질 기관과 외국인 대결의 전초전이었다. 기관과 외국인의 승부는 이후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9월말까지 계속 순매도로 일관했다. 반면 기관은 외국인이 파는 물량을 매수했다. 이에 따라 외국인의 9월 순매도 규모는 무려 5,007억원에 달했다. 그동안 주가는468~486을 오갔다.


10월 외국인 순매수, 기관 순매도

그런데 10월 들어 외국인과 기관의 매매 패턴이 뒤 바뀌었다. 9월에는 팔기만 한 외국인이 순매수로 돌아선 것이다. 반면 기관은 순매도로 전환했다. 9월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외국인의 매수세는 규모가 더 커졌고 기관들도 뒤질세라 대규모 물량을 토해 냈다. 그러나 총알 싸움에서 국내 기관들은 외국인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주가는 슬금슬금 상승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0월말엔 540선까지 뚫고 상승했다.

이처럼 외국인이 무섭게 주식을 사 들인 것은 미 증시의 강한 반등과 미 주식형펀드의 자금 유입에 기인했다. 911 테러 이후 폭락한 미 증시가 한달여만에 테러 직전 지수대를 회복하고 추가 상승마저 시도하고 있는 것에 힘입어 우리 시장에서도 외국인이 매수 강도를 강화한 것이다.

당시 미국 주식시장에선 미 경기가 연말이나 2002년 1ㆍ4분기 V자 반등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세를 넓혀갔다.

특히 환매 사태마저 우려됐던 미 주식형 펀드로 신규 자금 유입이 이뤄짐에 따라 매수 여력이 커진 외국인이 이머징 마켓중 저평가된 한국 시장을 집중 공략한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휴대폰 시장의 예상밖 수요로 4ㆍ4분기에는 3ㆍ4분기보다 실적이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면서 외국인들에게 ‘바이 삼성전자’를 외치게 했다.

그러나 기관들의 생각은 달랐다. 기관들은 대체로 경기 전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테러 사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펀더멘털 측면에서 전혀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악화일로 인데 주가가 오를 리 만무하다고 본것. 이 때문에 기관들은 외국인이 연일 순매수할 때에도 계속 주식을 팔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수가 테러 사태 직전 지수인 540마저 뚫고 올라가자 기관들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가가 꼭 펀더멘털 측면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선반영할 수도 있다며 일부 증권사는 기존의 부정적인 시황관을 긍정론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꼼지락꼼지락 거리며 460대에서 출발, 이미 540대까지 오른 지수대가 기관들에게는 부담이었다. 뒤늦게 외국인의 매수세에 동참했다 자칫 상투를 잡을 가능성도 컸다. 결국 외국인의 힘에 의해 지수는 테러 직전 지수대를 회복했고 기관들은 이를 바라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11월 들어서도 기관과 외국인은 서로 다른 매매 패턴을 보이며 힘겨루기를 계속하고 있다. 9, 10월처럼 일방적인 순매도나 순매수 모습 대신 1~2일 외국인이 순매수, 기관이 순매도하면 다음 1~2일은 외국인이 순매도, 기관이 순매수 하는 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수는 횡보 국면에서 게걸음을 하고 있다.


1차전 기관 승, 그러나 불안한 기관

아직 기관과 외국인중 누가 승자인 지를 말하긴 어렵다. 9월 낮은 가격대에 산뒤 10월 높은 가격대에 판 기관이 언뜻 보면 시세 차익을 올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팽팽한 줄다리기속에 횡보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종합주가지수가 570선 이상으로 훌쩍 올라가면 기관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이 경우 기관이 뒤늦게 매수세에 가담하는 것은 결국 싼가격에 팔았던 주식을 비싼 가격에 다시 사는 것이 된다.

기관의 매수세가 들어오면 외국인은 매물을 내 놓으며 차익실현에 나설 것이 자명하다. 한애널리스트는 “시장의 주도권은 이미 외국인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며 “최후의 승자는 실탄이 충분한 외국인이 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일 지수가 장중 한 때 550선을 넘어서자 국내 기관들은 불안한 마음에 외국인을 따라 매수세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가가 다시 500선 전후로 물러날 경우엔 외국인은 엄청난 평가손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비싸게 산 주식의 주가가 연일 하락하면 손절매 차원에서 팔 수 밖에 없을 테고 그동안 순매도로 매수 여력이 생긴 기관은 싸게 나온 매물을 주워 담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한편 최근 증시에선 외국인의 순매수 랠리에 기관이 동참하는 쌍끌이 장에 대한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일부에선 이 때문에 지수가 600선 고지 탈환을 시도할 것이란 시각도 제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 F투자자문의 한 펀드메니저는 “이번 테러 사건 이후 전개되고 있는 증시의 흐름은 국내 기관과 외국인의 진짜 실력을 판가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그러나 증시는 워낙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연 누가 마지막으로 웃게 될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박일근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11/08 18:02


박일근 경제부 ik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