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국회 방청 20년 단골 정경찬 옹

"세금갖고 엉뚱한 짓 하지 말아요"

“20년전엔 성의라도 있었는데 10년전부터는 말뿐입니다.”

누구겠는가? 국회의원들이다. 20년간 국회 단골방청객으로 자리해온 정경찬(80)옹은 그래서 허탈하다. 그의 20년 결산보고를 더 들어보자.

“1980년 제가 건의했던 문제가 정부에서 예산부족을 이유로 취소됐습니다. 그해 동절기 영세민 취로사업을 재고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대정부질의때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질의를 해주셔서 결국 해결이 됐습니다.

얼마뒤 일간지엔 ‘올 겨울 영세민 취로사업을 실시한다’는 보도가 다시 실렸고,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제됐습니다. 그때의 기쁨과 고마움이란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 경험 때문에 제가 이 일을 계속하게 되기도 했구요.

그런데 1990년 이후부턴 더 이상 그런 풍경을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무슨 말을 꺼내든 다들 말로만 옳다고 하지 실제론 국민의 어려움은 뒷전에 둔 채 자신들의 당리당략이나 사리사욕만 앞세웁니다.

국회 출석률이나 회의 경청태도도 예전에 비해 훨씬 낮고 불성실해졌지만, 한편으론 방청객 수도 많이 줄었습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국민의 무관심까지 불러온 겁니다. 사실 봐야 뭘 하겠습니까, 한심한 일 뿐인데.”

정책건의 20년. 임명장 없는 서민대표 정옹은 한마디 한마디까지도 마치 공문서를 정리하듯 또박또박하다. 입법현장의 단골 방청객이 된 것도 자신의 애 타는 건의안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지켜보느라 쌓인 경력이다. 첫10년은 그나마 신이 났지만 두번째 10년엔 맥이 다 풀려버렸다. 앞으로는 더 까마득하다.


“잘못된 제도가 한심한 국회의원 만들어”

“개인적으론 국회의원 친구도 많지만, 하는 일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긴 지금같은 제도하에선 누가 있어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제도 자체가 잘못 돼 있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건 악한 제도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켜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 갈등과 모순을 더 키워놓기 때문에 그런거라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도 나옵니다. 방법은 제도부터 바로잡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부터 국회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보수정당뿐 아니라 이념정당이 동등한 힘을 가지고 국회에 진출해있어야만 그들이라도 서민생각, 빈곤층 생각을 해줍니다. 그렇지않고서는 더이상 서민이 살아나갈 길이 없습니다.”

환갑때부터 거의 매일 국회도서관이나 그외 공립 도서관을 드나들며 독서량을 늘린 정옹. 손문의 ‘삼민주의’,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비롯해 도움이 되겠다 싶은 정치, 경제 서적 등을 두루 독파해왔다.

신문도 ‘색깔’ 구분없이 다양하게 읽고, 노동계 동향은 가장 최근 소식까지도 훤히 꿰고 있다. 직접 현장을 돌아보기도 한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실련 등 재야단체에서도 ‘정선생’은 낯익은 얼굴이다. 이 부산한 활동의 목적은 오직 하나. ‘국회의원을 움직이자면 나도 그만한 대화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열성 때문이다. 따지자면 그는 재야의 운동가다.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의 대변인이다.

수년째 매달려온 노인복지 문제만해도 실망 일색이다. 선거철만 되면 공약으로 앞세워지다가 당선만 되고나면 내팽개쳐지는 정치인들의 홀대 메뉴중 하나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수십년간 지켜봤어도 공약 한번 제대로 지키는 사람을 못봤습니다. 국회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기대를 걸었던 야당 출신의 전ㆍ현직 대통령들까지도 역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걸 보면 솔직히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오히려 노인들의 버스요금 무료나 목욕요금 반값 할인이라도 철저히 지켜졌던 1980년대보다도 지금이 못합니다.”

그 배경도 모르는 게 아니다. 복지제도의 천국인 유럽의 사회보장제도 기반과 국내 실정의 근본적 차이점과 개선방안 등, 지면상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조목조목 논리정연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정옹은 이처럼 체계적인 자료로 정책개선안을 정리, 오랜 기간 국회의원들에게 제공, 봉사해 온 경력이 있다. 주장과 구호에만 치우치는 건의가 아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남다른 독서열로 극복

학벌을 중시하는 이들에겐 다소 실망스런 얘기겠지만, 정옹의 정규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장에서 끝나있다. 그외 터득한 모든 지식은 순전히 격변기, 과도기의 시대를 살아오며 쌓은 사회경험과 남다른 독서열에서 얻은 것들이다.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하에서 초등학교도 어렵게 마쳤다. 졸업시 성적이 전체 1등, 군수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길까지 올랐지만 자력으로 돈도 벌고 공부도 하겠다던 계획과는 달리 ‘조선인 돼지’라고 욕하는 또래 일본인들의 모욕에 한바탕 싸움을 벌인 뒤 1년만에 다 팽개치고 돌아와버렸다.

목포에서 상점 점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서울의 외삼촌 곁에서 운송사업을 거들었다. 독립해 자영업도 잠시,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피란을 다니던 끝에 고향의 면사무소 서기로 2년간 일한 경험도 있다. 서울수복과 함께 다시 상경해 그때부터 퇴직할때까지 골재납품, 토목공사 하청업을 벌였다.

그러나 그다지 돈을 벌진 못했다. 사업의 특성상 들어오는 일감이 불안정한 탓에 늘 생활고의 불안을 안고 살았다. 몇달씩 일거리가 떨어질 땐 아내가 대신 품삯일을 다니기도 했다.

자녀 6남매도 고등학교까지 거둔 것이 전부, 개중엔 중학교로 끝마친 자녀도 있다. 현재 공무원으로 봉직하고 있는 셋째딸도 제 손으로 학비를 벌어 대학, 대학원까지 공부, 그런저런 생각만 하면 지금도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저미는 부정(父情)이다.

서민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나선 것도 그 자신이 겪은 동병상련 때문이다. 1980년 김정례 당시 보사부장관은 ‘동절기 영세민 취로사업을 취소한다’는 발표를 했다.

취로사업으로 근근히 겨우살이를 견디던 이들에겐 절망적인 비보였다. 정옹의 생업이 토목관계 사업이다보니 사람들의 고통이 더욱 절박하게 체감됐다. 꼼짝없이 굶어죽게 됐다는 한숨이 도처에서 귓전에 꽂혔다.

안타깝고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국회로 찾아갔다. 어렵사리 국회의원들과 면담하며 ‘어떻게든 취로사업을 살려놓지 않으면 수백만 영세민들이 굶어죽는다’고 호소했다. 본회의때 담당 장관에게 꼭 대책을 물어달라고 연거푸 다짐을 받았다. 애가 타서 직접 처리과정을 지켜보기로 했다. 방청권은 국회의원을 통해 얻었다. 방청객에게 주지되는 준수사항은 예나 지금이나 엄격하다.

입장전 몸 수색부터 시작해 방청중 절대 소리를 내지말 것, 다리를 뻗거나 꼬아 앉아서도 안되며 몸을 부시럭거리지도말 것,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며 조금도 의심스러운 동작을 취하지말 것 등. 그리고도 사방에 경호원들이 지키고 서서 내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

정옹의 바램 그대로 몇몇 의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후속대책을 장관에게 질의했다. 그때도 문제는 예산부족이었지만, 진지한 논의 끝에 결국 타 부처의 예비비를 활용하는 아이디어가 도출돼 나왔다. 어쨌든 민생현안을 저버리지 않는 국회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제 덕인지 사람들이 알아주더냐구요? 에이, 그런걸 뭐하러 알립니까. 저는 못난 사람일뿐, 그냥 어려운 분들께 도움이 됐으면 그걸로 된거지요.”


반정부 인물로 찍혀 국회출입 못하기도

정옹의 국회의사당 ‘개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영세민뿐 아니라 장애인과 실업자, 노인 복지문제 등 20년을 한결같이 힘 없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뛰어다녔다. 한때 둑방과 거리로 내몰리던 세입자 철거민 문제때도 정부의 아파트 임대 혜택을 끌어낸 결실이 있었다.

지금도 빠르면 3시간만에 성경 신구약 전체를 줄줄 암송할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에게 때로는 ‘차라리 성경공부에만 전념하시는게 더 편안치 않으시겠냐’고 조용히 만류하던 가족도 없지 않았다.

물론 초창기때 잠깐의 일이다. 지금 정옹에겐 가족이 누구보다 큰 힘이다. 자식들의 후원외엔 20년간그 어떤 외부의 선물이나 소소한 차비 한번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를 접해 본 사람들 사이에선 익히 ‘깨끗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동안 ‘반정부 인물’ 블랙리스트에 오른 적도 있다. 건의하는 사안이나 재야단체들과의 접촉이 빈번하다보니 뒤따른 혐의였다. 정보기관의 취조를 받기도 했고 구류를 산 적도 있다. 국회에서도 그 때문에 몇달간 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맨날 드나들던 곳인데 어느날 갑자기 못 들어가게 막는 겁니다. 제가 반정부 활동을 하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그렇다고 통제요원이 귀띔해주더군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제 순수한 뜻을 아시니까 대신 다른방법으로 들어가는 요령을 슬쩍 알려주더라구요. 의원측에서 저를 공무상 불러들이는 형식을 취하는 거죠. 그렇게 들어가고도 정보기관 요원이 방문앞까지 따라오며 감시했습니다. 서너달쯤은 그렇게 불편하게 다녔어요.”

국회에서 벌어지는 한심한 풍경들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갈수록 부실한 회의, 그것도 어쩌다 조금 진전이 있는가 싶으면 금새 토막이 난다. 수시로 휴회에다 산회, 지켜보기도 부끄러운 날치기 법안 통과, 멱살을 드잡는 3류 육탄전등. 자신까지도 부끄러워져 혼자 가슴을 쳤다.

“올해도 적지않은 건의를 했건만 단 한 건도 이뤄진 게 없습니다. 모두가 예산탓만 합니다. 사실 그른 말도 아니지요. 조세징수율을 보면 복지제도가 잘 된 유럽의 경우 스웨덴이 63%, 독일만해도 50%나 되는데 우린 고작 21%에 불과하니 복지를 할래야 할 돈이 없을 수 밖에요.

세제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것도 없는 서민층 주머니만 점점 더 쥐어짜는 간접세가 아니라 고소득자에게 적용되는 직접세 위주로 개편해야 예산이 충실해지지요. 그나마 얼마 안되는 세금갖고 엉뚱한 일도 하지 말구요.”


“공무원ㆍ교수 노조 허용해야”

기대와 실망의 반복끝에 그가 요즘 특히 총력을 쏟는 사안중하나는 공무원, 교수 노조 허용문제다. 이전의 복지문제와는 다소 동떨어진 주제같지만 캐고 들어가보면 그의 지향점은 하나다.

“공무원 노조설립, 공무원 노조의 정치참여가 허용돼야만 차후 선거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제도하에선 절대 아무 것도 안됩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도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동등한 처지에서 정치활동을 벌이는 날이 오기전까진 서민들의 삶은 아무 것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7년전 아내를 위암으로 떠나 보낸 정경찬옹. 홀로 넘는 팔순 고개라도 건강만은 끄떡없다. 남다른 신앙심으로 무한충전되는 정신력과 매일 3-4km씩 걸어다니는 생활습관 덕분이다.

이번주에도 그의 국회 ‘출근’은 이어진다. 진정한 투사는 장기전에 강한 법, ‘내년 2월엔 꼭 공무원 노조 허용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는 웅변을 되던지며 떠나는 노장의 걸음이 사뭇 꼿꼿하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0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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