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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전통유산의 재해석

한국적 전통유산의 재해석

극단 아리랑 '정약용 트로젝트', 김용복 무용단 '동다송'

전통 다도(茶道)가 현대 무용으로 거듭난다. 또 시대를 앞섰던 대학자 정약용의 삶은 전통 예술의 옷을 입고 되살아 온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11월 초입, 우리 고유의 문화 유산을 변용한 현대적 무대 두 편이 독특한 추억을 선사한다. 전통유산을 한 데 버무린 민요 잔치나 마당놀이식의 백화점 진열장이 아니다.

선정주의 아니면 엽기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최근 공연계에서, 극단 아리랑의‘정약용 프로젝트’와 김용복 무용단의 ‘동다송(東茶頌)’은 올 하반기 공연예술계가 건져 올린 큰 수확으로 기록될 두 작품이다.


▣ ‘동다송’

녹차를 이용한 갖가지 건강 보조 상품이 봇물을 이루는 시대다. 사람들은 이제 허드렛 물 마시듯 녹차를 마시거나 버린다. 그러나 김용복 무용단의 ‘동다송’을 보고 난 뒤라면 그럴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도를 무용으로 엮어 낸 최초의 다무(茶舞)다.

구도의 길에 들어 선 수도자가 존재의 갈증을 푸는 과정이 무대에 펼쳐진다. 표현은 철저히 차(茶)와 관련해서만 이뤄진다. 찻잎을 따 차를 만들고 불을 피워 찻물을 끓여 한잔의 차로 우려 내 마시기까지의 다섯 과정이다.

한국 무용을 전공한 여자 무용수 8명, 현대 무용으로 단련된 남자 무용수 4명이 펼쳐내는 무대는 정밀(靜謐)함과 역동이 어우러진 화합그 자체다. 거문고와 장고 등 우리 전통 악기가 빚어 올리는 명상적 선율과, 신디사이저에서 건져 올린 선율이 전편을 장식한다. 동양적 신디사이저 음악의 표본을 이뤘던 인기 TV 시리즈물 ‘실크 로드’에 필적하는 경지다(음악 신혜영).

‘동다송’이란 한국 차문화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초의스님이 지은 다도의 고전. 차나무 소개, 차에 얽힌 갖가지 고사 등을 곁들여 한잔의 차를 마시기까지를 한편의 시로 표현, 우리 다도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저서다. 이 책이 춤으로 거듭 나는 것이다.

초의스님이 겪었던 인고의 시간을 표현하는 제 1장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무대는 60분간의 여정을 향해 길을 뜬다. 경칩으로 잠을갠 대지가 피어 올리는 찻잎을 표현하는 2장 우뢰웃음(雨前雷笑), 찻잎을 덖어 찻물을 끓여 내는 3장 솔바람소리(松風槍雨)로 접어 들며 무대에는 맑은 차향이 슬슬 감돌기 시작한다.

폭포를 건너 온 벗을 위해 차를 준비하는 4장 청산에깃든 구름(靑山白雲) 대목을 거쳐, 제 5장만종뇌소(滿鐘雷笑)로 접는다. 차를 마신 뒤 비개인 하늘처럼 맑아진 마음, 법당의 종소리를 듣고 웃음 머금는 마음의 경지를 가리킨다.

안무를 맡은 대표 김용복씨는 “현대 무용이 대중과 괴리를 빚고 있는 현상황에서 요즘 사람들의 일상이 된 차 문화를 소재로 해, 답답함을 극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의 소망에 차동호회 ‘향기를 찾는 사람들’ 회원 박희준씨가 대본을 써 온 것. 불가와 차의 인연을 형상화해 내는데에는 일지암 주지 여연스님의 자문이 한몫했다.

김씨는 “여타 화려한 무용 무대에 비겨서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무대”라며 “다도는 정적(靜的) 일 뿐 이라는 기존 상식을 뒤집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동서양 무용의 화합을 이뤄낸 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이수자이기도 하다.

관련 단체의 화답이 인상적이다. 차동호회, 불교계의 협찬은 물론 인터넷상의 예술 전문 채널 ‘마루 TV’는 동영상 협찬을 약속했다. 인터넷 등 관련 매체에서의 선전에 긴요하게 쓰일 전망이다.

또 공연 소식이 알려지자 극장 위치를 묻는 등 관심을 보여온 일반 관객을 위해서는 차 상식 코너와 다기 제작 시범 코너도 마련됐다. 지난 여름, 하동에 내려가 직접 차를 따 보는 등 차를 알기 위해 애썼던 무용단측의 노력이 결실 맺는 것이다.

이 작품은 ‘동양적이다, 서양적이다’, 뚜렷이 장르를 구분하기 힘들다. 2~3년전부터 부쩍 유행하는 복합 장르 무용의 연장선 위에 놓인 작품이기 대문이다.

무대의 말미, 모든 무용수가 대형 다기 100여개가 놓여 있는 사이사이에서 춤사위를 펼치는 장면이 압권이다. 홍원기 연출, 김용복 김은정 김혜윤 이혁 등 출연. 9~10일 한전 아츠풀 센터. 9일(금) 오후 8시, 10일 오후 5시(02)386-0547


▣ ‘정약용 프로젝트’

“시(詩)는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써 임금과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도입부의 타령이다.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극의 서문(프롤로그)다. 장중하기 그지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배우가 저 대사를 치는(말하는) 것을 들어본다면, 도대체 말을 하는지 노래를 하는지, 구분이 안 가기 십상이다. 지금껏 보아 온연극 어법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비일상적인 저 발화법에 큭큭 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땀을 빼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대는 너무나 진지하다. 때로는 판소리 무대같기도 하다.

배우들의 연기 사이사이, 장구와 북 장단에다 “얼쑤” 소리가 끼어든다. 무대 한편에 앉아 있는 배우들은 극 내용에 따라 “정약용을 죽여라”,“전하, 나라에 법도가 엄연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등의 대사를 입모아 말한다. 무대 밖에 있으면서 무대의 상황에 맞춰 참견해 가는 이들은 고대 희랍극에서의 코러스인 셈이다.

극단 아리랑의 ‘정약용 프로젝트’는 일반 관객에게 낯섦으로 다가올 작품이다. 화법부터 확 뜯어 고친 그 낯섦은 연극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우리는 그런 실험을 접하곤 한다.

1999년 8월 한달 내내 연출가 김아라의 극단 무천은 ‘햄릿 프로젝트’로 한적한 죽산 시골 마을을 잠못들게 했다. 방치됐던 논 바닥이 대형 야외무대로 거듭난 것이다. 2년 지나, 이제는 극단 아리랑의 ‘정약용 프로젝트’다.

‘햄릿 프로젝트’는 세익스피어의 원작을 해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모범을 보여줬다.‘정약용 프로젝트’는 정약용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포스트모던 예술 창작법을 지극히 한국적인 관습 속으로 끌고 들어 온다. 그 효과는 놀랍다. 이 무대를 실제로 접해 보지않고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전통 문화라 하면 얼른 떠오르는 마당놀이를 보자. 놀부나 변강쇠가 입심을 펼치고 객석은 몇몇 스타급 배우의 넉살에 자지러진다. 그 같은 마당놀이에서 신명은 관습적이고 상투적일 뿐이다. 전통이라는 깃발을 내세웠지만, 마당놀이는 ‘한국적 미학=질펀한 해학’이라는 도식 아래 모든 것이 버무려져 왔다.

그러나 이 극에서는 우리 고유의 엄정한 미학을 빌어, 새로운 공연 양식으로 형상화하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두기 때문이다. 대본부터 특이하다. 아예 악보다(A4 용지 85쪽 분량).

단락이 시작하는 곳마다 타령, 다드래기, 발뻐드레 등 전통 장단 양식이 지정돼 있다. 한국의 전통 기보 양식, 정간보(井間譜)에다 대사를 일일이 써 넣었다. 서양식으로 말한다면, 연극 대본을 5선보에 쓴 셈이다. 음표와 쉬표를 일일이 기입한 뒤, 그밑에 노래 가사(대사)를 기입한 식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극에서 배우는 악보에 지시된 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된다.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밀한 대본이다.

이 극을 가리켜 연출자 김만중(38)씨는 “전통 연희의 새로운 현대화”라 압축한다. 한국인 고유의 말장단과 호흡 습관을 합쳐, 새로운 어법으로 승화시킨 ‘토리극’이라는 것. 한국말 특유의 구성 원리를 바탕으로 삼아 노래와 춤으로 낸 새로운 연극 형식이다.

첫선 보이는 토리극은 공연의 양식화라는 면에서 중국 경극이나 일본 가부키와는 다르다. 중국 경극(京劇) 이나 일본 가부키(歌舞伎) 의대사는 지나치게 양식화 된 나머지, 배우가 마치 자동 인형이나 다름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배우가 극 내용에 따라 강약과 감정을 조절, 무대에 넘치는 생동감부터 경극ㆍ가부키를 뺨친다.

노래ㆍ춤ㆍ말 등 3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한국 고유의 연기술 가무설작법(歌舞設作法) 덕택이다. 민간 가요(風), 연회 음악(雅), 제의음악(松) 등 전래의 다양한 공연 양식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에게는 분명 낯선 연기술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표연(表演)’이라는 사라진 전통이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된다. 연출가가 직접 배우로 참여, 관현악단의 지휘자나 전통연희의 꼭두쇠처럼 실제 무대에서 극을 이끌어 가는 연희작법이다.

지난 4월 전통연희개발추진위원회(위원장 심우성)가 주관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하는 ‘2001년 전통연희극 개발 작품’으로 이 작품이 당선됐다는 사실은 극단 아리랑의 실험에 무게를 실어 준다. 덕분에 제작비 4천만원도 지원받았다.

여타 연극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장면(scene)이 다양하다(총 18장). 다산의 과거 급제 잔치-노론의 다산 제거 음모-수원성 건설 대성공-천주교도로 몰아 내쫓으려는 노론의 공작 등이 전편을 장식한다.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가 죽자, 신유박해를 당하더니 정약용은 결국 유배돼 유배지 초당에서 백성을 위해 500여권의 책을쓴다.

관리들의 모진 수탈에, 백성이 마침내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기도 했다는 기록을 무대화한 대목에서 객석은 얼어 붙을지도 모른다. 자식에게까지 고통을 물려준 생식기가 죄인이라는 것. 한편 동생 정약전과의 눈물겨운 우애는 또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시대를 앞서 갔던 죄로 박해받아야 했던 자의 따스한 인간성이 부각될 자리다.

들을 거리 또한 풍성하다. 북과 장고의 타격음은 죽비처럼 객석의 의식을 내내 후려치고, 신시사이저는 현악음으로 무대를 감싸준다. 14~12월 9일 학전 그린소극장. 화~금 오후 7시 30분, 토ㆍ일 오후 3시 30분 7시 30분(02)741-5332.

이들 무대는 그동안 우리가 전통 유산을 얼마나 상투적으로 소비해 왔는 지에 대한 즐거운 반성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aje@hk.co.kr

입력시간 2001/11/0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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