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세종로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비전(碑殿)일까? 비각(碑閣)일까?….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광화문 네거리, 종로 1가에서 세종로와 만나는 길목, 바로 교보빌딩 서남쪽 모퉁이에 비각(碑閣)이 하나있다. 이 비는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 寶齡 望六旬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라는 길고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슨 뜻인고 하니, 대한제국의 대황제(고종)의 연세가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 다시 말하면 51세가 되는 것과 보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를 기념해서 세운비라는 뜻이다.

고종은 1852년생으로서 12살 되던 해인 1863년 왕위에 올랐다. 1902년은 그의 나이가 51세가 되고, 왕 보위에 오른지 40년이되므로 그 전해 12월 당시 황태자(뒷날의 순종)가 상소를 올려 이를 기념하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잔치를 베풀 것을 청한다.

이 자리에서 기념사업이 논의 되어 1902년(광무 6년) 5월4일, 고종이 기로소(耆老所:조선조 태조에 설치된 정이품 이상의 관원으로 나이가 70이 넘는 사람들에게 경로(敬老)의 예우를 갖추는 기관)에 들었다. 나랏님도 나이가 많으면 특별히 기로소에 드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테면 태조가 60세, 숙종이 59세, 영조가 51세에 기로소에 든 전례가 있다. 1902년에도 영조의예에 따라, 고종을 기로소에 들도록 배려한 것이다.

조선조 때 기로소는 육조거리(오늘날 세종로) 동쪽 끝자락에 있었다. 그 기로소 자리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석조 보호각을 두른 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비각이다.

왕이 아닌 황제로서 고종의 장수와 오랜 재위를 기념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땅에서 이중으로 쌓아 올린 기단 이라던지, 그 위에 정면 3간, 측면 3간에 다포식 건물이 더욱 돋 보인다. 주위에는 돌 난간을 두르고 난간 기둥에는 상서로운 짐승을 조각한 석물을 얹혔다.

남쪽의 정면에는 홍예문(무지개문)을 세우고 그 가운데는 ‘만세문(萬世門)’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문짝은 철 격자문에 태극문양을 넣었다. 비각의 지붕과 홍예문의 조화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그런데 일제가 우리국토를 유린하면서 이 만세문도 온전치 못했다. 일제시기에 일본인이 만세문을 떼어다가 충무로에 있는 여염집의 대문으로 사용하였는데 그나마 한국전쟁의 와중에 일부 파손되었다.

그것을 1954년 7월 ‘비전’을 보수하면서 다시 찾아다 세우고 79년에는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는 수난의 문이다. 이 비석을 살펴보느라면,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흔히들 이 보호각을 일러 ‘비각(碑閣)’이라 부르는데 편액을 보면 비각이 아닌 ‘기념비전(記念碑殿)’으로 되어있다.

신분제가 분명했던 조선시대에는 건물에도 그 주인의 신분에 따라 격이 달랐고, 그 명칭도 구분해서 붙였다. 건물에 ‘전(殿)’자가 붙는 것은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과 걸림이 있는 건물에만 붙었다.

그래서 왕을 보를 때 전하(殿)’자가 붙는 것은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과 걸림이 있는 건물에만 붙였다. 그래서 왕을 부를 때 전하(殿下)! 전하! 라고 한다.

가람같으면 부처님의 공간인 건물에만 ‘전’자를 붙였다. 그래서 대웅전이니 극락전이니 적광전이라 부른다. 궁궐이나 일반 여염집에서는 아무리 높은 신분일지라도 왕이 아닌 이상, ‘당(堂)’자나 그 아래인 ‘합(閤)’, ‘각(閣)’, ‘재(齋)’, ‘헌(軒)’등 다른 글자를 붙여 격을 낮추었다.

그런 것을 일제가 우리국토를 유린하면서 우리 국왕을 전하에서 합하(閤下), 각하(閣下)로 낮춰 불렀던 것. 따라서 이 비도 비각이 아닌 ‘비전(碑殿)’이라 불러야 옳다.

<사진설명> ‘비각(碑閣)’이 아닌 기념비전(記念碑殿)의 편액이 달린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

입력시간 2001/11/1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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