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83)] 모노쓰쿠리(物作り)

정보기술(IT) 거품이 걷히면서 많이 잦아 들었지만 90년대말 일본에서는 '모노쓰쿠리'(物作り) 경제 한계론이 무성했다. 근대화 이래 서구의 산업 기술을 맹추격, 세계 정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의 생산과 대량 수출, 막대한 무역 흑자를 쌓아 올리는데 성공했지만 강력한 금융시스템과 정보기술을 결합한 미국의 신경제에 참패했다는 반성이었다.

이 때문에 IT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졌지만 그 결과가 일본판 IT 거품 붕괴로 이어지는 바람에 좌절감만 커졌다.

일본의 좌절감은 태평양 전쟁 패배 이래 일본인의 잠재 의식을 지배해 온 대미 콤플렉스를 한결 뚜렷하게 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의 중심국인 미국은 언제든 새로운 규칙을 제정, 이를 새로운 경제 논리로 세계시장에 강제할 수 있는 패러다임 창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일본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논의가 활발해졌다.

한편으로 이런 좌절감은 한동안 무시됐던 '모노쓰쿠리'의 강점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제 전체에서 유통과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든 생산은 경제의 기초이며,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강점을 살리는것 뿐이라는 자각이다.

일본 경제의 최대 강점이 '모노쓰쿠리' 능력이라는 점에는 내외에 이견이 없다. '모노쓰쿠리'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물건 만들기가 된다.

원래는 농사를 뜻하는 말이었고 쌀 경작을 여전히 '고메즈쿠리'(米作り)라고 하는 등 농업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모든 생산과 가공, 제조를 두루 가리키지만 지금은 주로 제품의 생산과 가공, 즉 제조업을 가리킨다.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은 소니나 마쓰시타(松下)의 전자제품, 도요타나 혼다의 자동차, 신닛테쓰(新日鐵)의 철강,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의 선박 등에서 알 수 있듯 80년대에 이미 세계 정상에 올랐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본격적인 근대화에 착수한 후발국이 100여년만에 2차대전 이전의 독일, 2차대전 이후의 미국을 따라 잡았다는 점에서 놀라운 성과이다.

이런 성과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흔히 패전 이후 일본 경제의 급속한 성장이 화제가 되고 한국이70년대에 이룬 고도 성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2차 대전 발발 당시 일본이 이미 세계 7위의 자본주의국이었다는 점에서 패전후의 경제 성장은독일과 마찬가지로 경제 부흥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일본의 경제력은 소니나 도요타 등의 대기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2000년 일본 기업의 생산액에서 자본금 100억엔 이상의 대기업은 40.1%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자본금 3억~100억엔의 중기업이 28.8%, 자본금3억엔 이하의 중소기업이 31.1% 를 차지했다.

대기업의 생산액 가운데 상당 부분이 자회사의 중소기업 생산액을 합친 것임을 감안하면 중소기업의 실제 생산액은 전체의 70%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중소기업 가운데는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업체들이 줄을 서 있다. 중소기업의 특성상 부품을 주로 생산, 대기업의 기술력을 뒷받침하지만 더러는 대기업과 당당하게 경쟁하면서 대기업의 기술 개발을 자극한다.

교토(京都)의 무라타(村田)는 세라믹필터 등 세라믹 전자부품 전문업체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부품만으로 전체 매출액의 70%를 채운다. 오랫동안 휴대전화의 핵심이었던 세라믹필터 시장에서는 50% 이상의 점유율을 자랑해 왔다.

90년대말 휴대전화의 소형화 바람을 타고 집적회로(IC) 채용이 늘어나자 세라믹필터의 초소형화에 나서 IC 제품을 능가하는 초소형화에 성공, 반도체 제조업체와 겨루고 있다.

와카야마(和歌山)현 가이난(海南)시의 노리츠는 사진 자동현상·인화기 시장에서 후지필름 등 세계적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런 우량 중소기업이 전국 곳곳에 분포, 현지 출신의 인재를 끌어 모으면서 지방 대학과 지방 경제를 떠받치는 순기능도 맡고 있다.

중소기업의 경쟁력은 가장 작은 규모인 '마치코바'(町工場)에서부터 나온다. 공장(工場)이라는 한자는 규모가큰 공장을 뜻할 때는 '고조'로, 소규모의 제작소를 가리킬 때는 '고바'로 읽는다. '마치코바'는 동네 공장이라는 말뜻 그대로 변두리 마을 한복판에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철공소 등의 작은 작업장이다.

도쿄(東京) 아라카와(荒川)구의 기요타(淸田)제작소는 마치코바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IC의 품질검사에는 콘택트 글로브라는 작은 대롱형 도구가 쓰인다. 직경 0.2㎜의 가는 대롱안에 직경 0.13㎜의 강철구슬이 들어 있다.

직경 0.5㎜의 강철구슬에서 손작업으로 이 작은 구슬을 만들어 낸 것이 기요타제작소였다. 동네 철공소가 보유한 이런 정밀기술이 중층적으로 쌓인 결과가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이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11/13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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