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대만 公娼

타이베이시 100년만에 공창폐지, 윤락가 건물은 박물관으로

타이베이(臺北)시 완화(萬華)구 화시지에(華西街) 뒷골목에는 특별한 박물관 하나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초라한 건물 전면에 내걸린 현판 이름은 ‘풍속역사 박물관’. 장장 100년에 걸친 타이베이 공인매춘(公娼ㆍ공창)의 역사를 일반에 공개할 곳이다. 풍속역사 박물관 건물은 이전에 공창관(公娼館), 즉 윤락가 건물이었다.

타이베이의 명물로 통하던 공창이 올 3월27일로 완전히 폐지됐다. 공창이 사라진 빈자리에 사창(私娼)이 범람하는 모순을 남긴채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폐지 전까지 영업을 하던 공창 거리는 모두 3곳. 화시지에를 비롯해 따통(大同)구의 구이수이지에(歸綏街)와 바오안지에(保安街)가 그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손님’을 맞은 공창은 42명.


총통시장 재임중 폐지령

공창이 사라지게 된 것은 천쉐이비엔(陳水扁) 총통이 타이베이 시장 재임 중이던 1997년 9월6일 폐지령을 내리면서부터.

당시 강력한 매춘추방 운동을 벌이던 천 시장은 ‘시정부가 비도덕적인 매춘을 공인할 수는 없다’며 즉각적인 철폐령을 내렸다. 철폐령에 대한 공창과 사회단체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공창들은 시민단체와 합세해 ‘공창자구회’를 조직, 시의 일방적인 조치에 반대하는 가두시위 등을 벌였다.

자구회가 반발한 이유는 크게 3가지. 시정부가 당초 약속했던 2년 유예기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첫째다. 공창들의 생계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편의행정이라는 주장이다. 둘째는 매춘도 직업이라는 것. 일반 육체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팔지만,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셋째는 공창이 없어지면 사창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논리다.

1997년 폐지된 타이베이 공창이 올 해 들어서야 없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99년 천쉐이비엔을 꺾고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된 마잉지우(馬英九) 시장이 당초 시정부의 약속대로 2년 유예기간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유예기간은 공창들의 전업에 필요한 일종의 완충기간. 마시장은 완충기간 전업을 원하는 공창과 그 가족들에게 일인당 매달 신대만폐 7,750위엔(28만6,750원)을 지원했다. 아울러 전업보조 차원에서 2년간 60만위엔을 무이자로 빌려주었다. 올 3월27일은 이른바 시의 유예기간이 만료된 날이다.

매춘업을 그만 둔 공창관과 공창의 변신은 다양하다. 구이수이지에의 공창관 ‘춘펑로우(春風樓)’는 이미 ‘공창 문물관’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반면 화시지에의 ‘구이삔로우(貴賓樓)’는 시의 전업허가를 얻어 음식점 영업을 하고 있다. 자구회를 이끌었던 공창 구안시우친(官秀琴)은 타이베이시 둥우(東吳)대 대학원에서 초빙교수로 ‘매춘과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공창 쇠락, 사창은 갈수록 늘어나

대만의 공창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유산이다. 이 유산은 국민당 정부가 49년 대만으로 패주해 온 이후에도 계속됐다.

국민당정부는 59년 아예 공창을 법으로 제도화했다. 공창의 자격은 20세 이상인 여성으로 자의에 의한 선택이어야 하고, 정기적인 신체검사에서 이상이 없어야 한다.

타이베이시는 한 발 더 나아가 73년 공창 관련 시조례를 개정, 공창의 자연도태를 유도했다. 포주의 업소 매매, 상속, 임대를 금하되 포주가 죽으면 해당 업소를 폐업하도록 한 것이다.

타이베이시는 공창을 폐지했지만 다른 지역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올 초 경찰통계에 따르면 대만 전역에 40여개의 공창관과 공창119명이 있다.

50~60년대 타이베이 화시지에의 한 골목에서만 100명 이상 공창이 문전성시를 이뤘던 때와는 격세지감이다. 공창의 쇠락은 법적인 제한보다 경쟁세력, 즉 암흑가가 주도하는 사창의 발흥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매춘은 아무래도 ‘펴놓은 멍석 위’보다는 은밀한 장소가 제격인 모양이다.

<사진설명> 100년 전통의 타이베이 공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암흑가가 주도하는 사창이밤거리를 지배하게 됐다. 사진은 1970년대 대만의 윤락가 모습.

타이베이=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1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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