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만추의 결혼식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낙엽이 다 떨어져 내린 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나간 세월을 다시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바로 이즈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가을에는 한 신랑이 자신의 고교시절의 추억이 담긴 교정에서 한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대부분의 미국 공립학교에서도 고등학교 정도 되면, 오륙백명 정도 들어갈수 있는 무대 시설을 갖춘 강당이 마련되어 있다. 학생들의 연극 공연이나 연주회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주마다 다르지만 대개 목사나 신부 등 성직자 앞에서 선서하는 것이 결혼의 조건이 되는 곳이니 만큼 결혼식은 주로 교회나 성당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번 결혼식은 바로 고등학교 교내에 있는 성당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 학교가 바로 뉴 햄프셔 주의 컨코드에 있는 세인트 폴 스쿨이었다. 현 부시대통령이 졸업한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와 함께 뉴 잉글랜드 지역의 대표적인 사립 기숙 학교인 이 학교는 규모 면에서 웬만한 대학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우선 2,000 에이커 가까이 되는 캠퍼스는 아예 커다란 마을에 듬성듬성 집들이 들어서 있는 것 같다. 이 캠퍼스에 총 500명이 조금 넘는 학생들이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다니고 있다. 남녀 학생 비율은 거의 같고, 모두 100명 가량 되는 교수진이 있다. 학생 5명당 1명의 선생님이 있는 꼴이다.

학급 규모는 대부분 1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하며, 가장 큰 학급이 15명이라고 한다. 500명의 학생들은 18동의 기숙사에 나누어져 생활하는데, 각 기숙사에는 최소한 3명 이상의 선생님들이 같이 생활한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박사학위 소지자도 13명이나 된다.

고색 창연한 성당을 마주하고 있는 도서관은 숙연한 느낌을 준다. 높이 치솟은 유리벽밖으로 보이는 성당의 붉은 색 벽돌과 연못은 그 사이에 놓여 있는 푸른 잔디밭과 함께 중세 수도원이나 우리 나라의 산사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학문의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도서실의 장서를 살펴보니, 최신 잡지나 문헌들은 물론이려니와 중세에 만들어진 성경이나 철학 책 등의 필사본들도 보관 전시되어 있어, 박물관을 연상케할 정도였다.

지나치다가 훔쳐 본 체육관은 웬만한 대도시의 상업용 헬스클럽은 비교가 안될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체 학생 수가 500명밖에 안 되는 학교에 28개의 운동 팀이 있다고 하니 거의 모든 학생이 한 두개의 팀에는 속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학생들은 자신의 취미에 따라 다양한 과외 활동을 즐길 수 있고 이를 위해 온갖 클럽을 조직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재원을 양성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미국을 주무르는 최고급 엘리트 계층들이 주로 이 학교와 같은 뉴 잉글랜드 지방의 사립 기숙학교 출신들이라는 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이러한 시설과 교수진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보니, 학비도 만만치 않아 미국의 웬만한 사립 대학보다 많다.

물론 학생들에게 받는 수업료만으로 학교를 운영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해 많은 부분을 학부모들이나 졸업생들의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학교의 재정이 워낙 튼튼하여, 심지어는 남부의 명문인 듀크 대학을 사려고 하였다고 하니, 웬만한 미국 가정에서는 자녀를 이런 학교에 보내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깊어 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하여, 이처럼 유서 깊은 학교의 성당에서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 한 쌍이 미국인 신부의 집전 아래 서로를 부부로 맞이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나라는 이미 세계화되었다는 것을, 더 나아가 세계 운영의 중심 축에 한발 더 다가 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 교육만큼 훌륭한 투자는 없는 것 같다.

입력시간 2001/11/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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