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85)] 쇼쿠닌(職人)(下)

분수를 알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려는 일본 ‘쇼쿠닌(職人)’ 사회의 뿌리깊은 전통은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에 족하다. 그러나 이런 직업 윤리와 생활 철학은 우리와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했으며 지배층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강하다.

일본에서 쇼쿠닌이 몸에 밴 기술로 물건을 만드는 수공업 기술자라는 좁은 뜻으로 정착한 것은 17세기 들어서였다.

가마쿠라(鎌倉;1192~1333년)·무로마치(室町;1333~1573) 시대까지도 쇼쿠닌은 훨씬 넓은 뜻으로 쓰였다. 원래는 하급 관직이나 장원의하급 사무직을 뜻했으니 조선 시대의 중인 계급을 연상시킨다.

가마쿠라 시대 들어 ‘이모지(鑄物師)’를 비롯한 기술자와 각종 예능인, 점장이를 포함한 다양한 직능인이 쇼쿠닌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장원의 영주에 예속된 하층민으로서, 직능을 역(役)으로 바쳐야 했던 기술자들의 사회적 지위상승을 반영한다.

또 농민에서 분화, 독자적 계층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신분제의 동요가 극심했으며 때마침 중심 세력으로 부상한 무사 계급이 이들의 존재를 인정했음을 뜻한다.

15세기 후반부터 각지의 다이묘(大名)들이 천하의 패권을 다툰 센고쿠(戰國)시대에 잇따라 성하촌이 건설되면서 상업지구인 ‘쇼닌마치(商人町)’와 함께 수공업지구인 ‘쇼쿠닌마치(職人町)’가 마련됐다.

다이묘들은 무기와 갑옷 등 전투 장비를 확보하고, 영지내 농민에 생필품을 공급해 농업 생산을 늘리고, 신무기의 구입을 위해 재화를 축적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수의 상공업자를 획득하고 보호·육성하는 정책이 불가결했다.

이를 배경으로 수공업자의 사회적 독립은 크게 촉진됐고 특정 분야의 기술자 조직인 ‘자(座)’도 잇따라 만들어졌다. ‘자’는 현재도 집단이나 단체, 또는 그런 조직이 운영하는 업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우두머리인 ‘오야카타(親方)’, 일반 기술자인 ‘데쓰다이(手傳)’, 견습공인 ‘도테이(徒弟)’ 등의 엄밀한 위계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 유교 중흥의 기초를 닦은 강항(姜沆)은 ‘간양록(看羊錄)’에서 조선땅에서는 천대를 받았던 기술자들이 분야별로 ‘천하제일’로 일컬어지며 두터운 대우를 받는 일본의 모습에 커다란 놀라움을 표했다.

흔히 이를 근거로 일본의 쇼쿠닌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으며 그런 자부심이 오늘날 일본 장인정신의 바탕을 이룬 것으로 설명된다. 강항이 일본에서 지낸 1597~1600년은 새로태어난 쇼쿠닌 계층의 사회적 자유가 절정에 달했던 극히 예외적인 기간이었다.

공급 측면의 통제가 행해졌던 과거와 달리 이때는 크게 늘어난 쇼쿠닌들이 대외 무역과 국내 수요의 폭증에 따라 영리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생산이 크게 늘어난 반면 쇼쿠닌 사이에서는 기술 연마보다는 영리 추구에 매달리는 한탕주의가 판을 쳤다.

당시의 문헌에는 우산 기술자가 들기름이, 목공 기술자가 목재가 모자라 발을 구르며 엉성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의 장인정신은 쇼쿠닌이 완전히 독립 계층으로 정착, ‘쇼쿠닌의 시대’라고도 불린 에도(江戶)시대 들어서야 제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전란후에 찾아 온 장기간의 평화는 상공업과 화폐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불렀다.

그러나 평화는 통제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우선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도가 강요됐고 화폐 경제와 무역도 ‘바쿠한(幕藩)’체제에 의해 통제됐다. ‘자’는 직능조합인 ‘나카마(仲間)’로 바뀌어일반 쇼쿠닌들의 자율성은 커졌지만 ‘오야카타’의 배정에 따라 작업을 하청받아야 했다.

물가 앙등에도 불구하고 공임의 인상은 강한 규제하에 있었다. 일정 범위안에서의 자유경쟁과 영리 추구만이 허용된 결과 쇼쿠닌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평균 3평의 좁은 셋방에서 일가족이 지냈다는 통계처럼 최소한의 생계 유지는 가능했지만 여유는 확보할 수 없었다.

기술만 있으면 언제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쇼쿠닌들의 자신감은 하루 벌이의 절반 이상을 술값으로 탕진하는 엉뚱한 풍조로 흐르기 일쑤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장인정신은 결국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마주한 체념이자, 한계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 수는 있다는 자기 위안이다. 가업을 잇는 전통도 다를 바 없다.

바쿠한 체제는 모든 신분과 직업의 고정을 강제했으며 특히 쇼쿠닌에 대해서는 도가 더했다. 1711년 바쿠후(幕府)가 내린 ‘가업에 전념해 게을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분수를 알아 넘어섬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이 좋은 예이다.

흔히 거론되는 한일 양국의 장인정신의 차이는 조선 후기 이후 양국의 사회적 통제의 정도가 크게 달랐던 것이 진정한 이유일 지도 모른다.

입력시간 2001/11/2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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