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禍不單行 이네"

수지 김사건은 은폐·조작 의혹, 테러방지법 등 악재 연속

‘화불단행.’ 국가정보원의 최근 처지에 들어맞는 단어다. 국정원은 일부 간부들의 진승현 게이트 등 개입의혹 사건과 이 사건을 둘러싼 내부 알력설로 곤혹스런 처지다.

여기에 수지 김 사건의 진상이 하나 둘 드러나고 테러방지법 제정안에 대한 시민ㆍ인권단체들의 반발도 거세다. 수지김사건 은폐 조작은 천주교정의 구현사제단과 천주교인권위원회의 87년 KAL기 폭파사건 재조사 요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지 김 사건 경찰수사 중단 압력

1987년 남편에 의해 살해된 수지 김(본명 김옥분ㆍ당시 34세) 사건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고 은폐했던 국정원이 지난해 2월 독자적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던 경찰 수사를 중단시킨 사실이 드러나 비난이 높아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국정원의 자체 감찰결과에 의해 최근 확인됐고 국정원은 이날당시 대공수사국장 등 관련자 4명의 인적 사항과 혐의 사실을 서울지검에 넘겨 수사의뢰했다. 국정원은 이와 함께 87년 사건발생 당시의 은폐책임에 대해서도 비록 공소시효는 지났으나 진상규명 차원에서 조사를 해달라고 검찰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수사중단 압력은 물론이고 이 사실을 은폐하는데 책임이 있는 국정원 및 경찰 관계자에 대한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등 혐의를 광범위하게 수사중이다.

국정원내에서 간첩ㆍ대공 사건에 대한 실질적 수사권을 가진 부서는 대공수사국.

대공수사국은 국내파트를 담당하는 2차장 산하이며 지난해 2월 경찰수사가 진행될 당시 2차장은 엄익준씨였다. 검찰은 엄씨와 대공수사국 간부들이 수사국직원들을 동원, 경찰수사 과정에 개입해 수사를 중단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엄씨는 지난해 2차장 재직시절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같은해 4월 숨져 끝까지 이 사건을 챙기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엄씨의 뒤를 이어 부임한 김은성 2차장이 외압에 개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엄 전 2차장이나 김 전 2차장이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지 김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청 외사부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검찰은 수지 김의 가족들이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한 시점보다 한달 가량 앞서 수사에 착수했고 남편 윤씨의 혐의를 상당 부분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져 수사를 방해받지 않았다면 지난해 윤씨를 구속할 수 있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경찰은 수사에 착수한 지 얼마되지 않아 국정원이 개입하자 “국정원의 협조요청에 따라 중단한다”고 기록한뒤 수사를 중단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밝혀내고도 국정원의 외압을 이유로 수사를 중단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따라서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청 외사3과 수사실무진과 외사관리관 등 지휘라인에 대해서도 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또 수지 김 사건에 대한 내사 및 외압사실이 당시 경찰 수뇌부에도 보고된것으로 알려져 파문은 확산될 전망이다. 국정원은 최근 검찰 수사과정에도 개입하려다 검찰의 반대로 실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지 김 사건은 87년 1월3일 남편 윤씨가 홍콩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김씨의 과거전력 등으로 말다툼을 벌이다 김씨를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이를 은폐하기 위해 김씨를 북한 공작원으로 몰아 간첩납치사건으로 위장했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윤씨의 범행사실을 알고도 간첩사건으로 조작했었다. 윤씨는 지난 13일 서울지검 외사부에 의해 살인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테러방지법 인권침해우려, 시민단체 반발

국정원이 입안한 ‘테러방지법’ 제정안도 인권ㆍ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반발의 핵심은 수사권 문제. 중앙집권화된 경찰력과 대테러특수부대 등 대응기구들이 있는 상태에서 국정원이 대테러조직을 장악하고 일괄 지휘하는 것은 권력의 집중 심화에 따른 인권침해 소지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국민의 감시밖에 있는정보기관인 국정원은 정보수집활동이라는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국정원이 통상 입법예고기간이 20일 이상임에 반해 테러방지법안은 10일간만 하기로 하고 공청회 등의 절차도 없이 이번 정기국회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고 반발해온 인권ㆍ시민단체들은 23일테러방지법 제정 재고를 촉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인권운동사랑방, 참여연대 등 67개 단체들은 이날 “국정원이입법예고 기간 중에 아무런 경과 설명없이 ‘테러방지법 제정안’을 바꿔치기 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이 새로운 법안의 일부 내용을 바꾸면서 내용을 수정했다는 어떤 공지도 없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국정원이 이처럼 서두르는 것은 법안을 강행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시민단체들은 특히 새 안도 기존 법안에서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기존 법안에는 국정원이 주도하는 대테러센터가 테러사건의 수사를 맡는다는 명시적인 조항이 있었으나 새 안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기는 했지만 곳곳에 이를 숨겨 두었다는 주장이다.

즉 새 안에서 이 법의 목적에 ‘테러 사건의 수사’(제1조)가 들어가 있으며 뒤에 가서 대테러센터의 공무원에게 사법경찰권을 주고 있다(제17조).

또 새 안 부칙 제2조2항의 ‘수사 등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문구도 문제소지가 있으며, 9개 부처 합동으로 대테러센터를 편성하겠다고 한 것에서 10개 부처로 늘리면서 검찰을 새로 넣은 것도 사실상의 수사활동과 관련됐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다.

이들 단체들은 새 안이 구속기간 연장, 참고인 구인ㆍ유치 조항을 없앴고 불고지죄 조항은 테러범신고불이행죄로 바꾸기도 했으나 인권침해 소지는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테러의 개념이 모호하고 외국인 동향 관리 조항및 난민 지위를 전연 고려하지 않은 테러범인의 인도 조항, 무제한의 감청, 군 병력에 대한 경찰권 부여 등을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항들로 예를 들었다.

이에 앞서 20일 열린 ‘테러방지법안 비판 긴급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울산대 이계수 교수(법학)는 “이 법안은 테러사태시 군병력동원과 동원된 병력의 경찰관직무집행법상 권한을 부여하고 있어 군과 경찰의 경계를 허물게 될 뿐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국가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법안이 설치를 규정하고 있는 ‘대테러센터’의 업무에는 테러사건에 대한 ‘수사’가 포함돼 있어 민간인에 대한 군의 수사권을 인정하고 있다”며“이는 헌법이 규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사재판을 받지 않을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 법하에서도 불심검문이나 통신매체에 대한 감청 등 광범위한 정보수집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물론 현행 국가정보원법도 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의 수집ㆍ작성 및 배포를 규정하고 있고 현역군인 등 필요한 공무원을 파견공무원으로 데려다쓸 수 있도록 돼 있다”고 덧붙였다.

토론자로 나선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부설 인권운동연구소 상임연구원은 “대테러센터의장을 국정원장이 제청하고 테러에 대한 판단과 군병력 요청ㆍ지휘ㆍ수사권도 국정원이 가진다는 것은 국정원이 행정기관의 업무에 대한 통제권 확대를 꾀하는 것으로 정보기관에 의한 인권침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거세자 정부는 22일 열린 차관회의에서 논란이 되고있는 일부 조항을 삭제하거나 개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KAL기 폭파사건도 의혹 제기

한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천주교인권위원회는 23일 기자회견을 갖고 대한항공 858기사건 7대 의혹을 제기하며 정부와 국회의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7대 의혹으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초동수사 ▲항공기사고 조사시 핵심인 블랙박스를 수거하려는 노력의 미흡 ▲당시 안기부의 증거확보 및 확인을 위한 노력 미흡 ▲김현희 일행이 탈출하지않은 이유 ▲당시 발표 때 김현희 사진이 다르다는 주장 ▲법정시한 전에 서둘러 사망처리한 이유 등을 들었다.

<사진설명> 국가정보원이 진승현게이트에 일부 간부들이 연루되고 수지 김 사건을 은폐ㆍ조작한데 이어 경찰의 수사마저도 중단토록 압력을 가한 사실이 드러난데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인권단체들의 반발도 거세 곤욕을 치루고 있다. 재판에 출두하는 진승현씨와 남편에게 살해된 것으로 드러난 수지 김의 생전 모습.

배성규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1/11/27 19:23


배성규 사회부 veg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