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반도체 정민수(38) 과장은 요즘 직장생활 12년 만에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1월 중순부터 보름 간 ‘무급 휴직’을 신청한 정 과장은 4박5일간 아내와 여행을 다녀 온 후 집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집안일도 도와가며 모처럼 ‘늦가을 휴가’를 즐기고 있다.
“15일간 무급휴직을 해 이 달 월급봉투가 절반으로 뚝 줄어들겠지만,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게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무급휴직 기간에 하이닉스에 대한 회생논의가 활발하고, 세계 반도체값 회복과해외투자유치 기대 등 ‘굿 뉴스’들이 쏟아져 나와 회사 밖에 머물고 있는 정 과장의 어깨를 한결 가볍게 하고 있다.
“제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일 할 때면 하이닉스가 우리경제의 애물단지 신세를 벗어나 회생의 가닥을 잡을 것 같습니다.” 정 과장은 “회사가 어렵다고 무조건 직원을 해고하는것 보다는 전 직원이 순환 무급 휴직을 해가며 고통을 분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내년 초 나머지 15일간의 무급휴직을 추가로 할 생각이다.
하이닉스는 한달 씩 무급휴직을 할 경우 직원들이 한달 치 월급을 받지 못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감안, 직원 1인당 15일씩 두차례 무급휴직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
새로운 구조조정 방식으로 정착
기업 인력조정 방식으로 정리해고나 희망퇴직 대신 하이닉스처럼 전 직원 순환 ‘무급휴직’을 실시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일정 기간 급여를 받지 않고 휴가를 다녀오는 무급휴직 제도가 불황 때 기업의 새로운 구조조정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들은 정리해고에 따른 노사마찰을 줄이면서 인건비 절감등 경영개선 효과를 거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숙련된 전문 인력을 내보내지 않고 경기 호전에 대비해 그대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무급휴직을 선호하고 있다.
911 미국 테러사태 발생 후 여행객 급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한항공은 최근 노사협의를 통해 부장급 이하직원 1만7,000명을 대상으로 내년 1월부터 1인당 1개월씩 순환 무급휴직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휴직은 15일씩 분리 실시도 가능토록 해 조직의 안정성을 확보토록 했으며 개인연금 등은 회사에서 지원키로 했다.
대한항공 김호택 이사는 “내년에 월드컵과 아시안게임 등을 전후해 항공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면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판단, 정리해고 대신 무급휴직 제도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임원들은 11월 초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25명이 이미 사표를 냈기 때문에 이번 무급휴직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대한항공은 말했다. 대한항공은 이번 무급휴직을 통해 연간 300억원 정도의 인건비 절감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또 퇴직금 중간정산도 1년간 중단, 경영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가 공동 노력하기로 했다. 비슷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아시아나항공도 무급휴직 실시를 검토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최근 발표한 구조조정안에서 연말까지 직원 360명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불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평가가 회사 안팎에서 나오자, 전직원 6,600명을 대상으로 내달부터 무급휴직제를 실시하는 방안을 포함한 추가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정리해고 대신 순환휴직제 채택
심각한 경영난을 맞고 있는 하이닉스반도체는 내년 3월까지 1만5,000여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11월부터 각 사업본부 및 팀 단위로 15일간 두차례 순환 무급휴직을 실시하고 있으며, 휴직 직원을 위한 별도 연수프로그램까지 만들어놓고 있다.
이를 통해 하이닉스는 약 20%의 인력을 일시에 감축하는 효과를 거둬 매달 약 30%의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삼성SDS는 직원능력개발과 잉여인력 조정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는 방식의 무급 휴직제도를 실시 중이다. ‘자기 계발을 위한 휴직제’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방식은 자비로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경우, MBA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휴직을할 경우 그 기간만큼의 경력을 인정해주는 제도다.
이 회사 관계자는 “직원들의 직무능력 향상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불경기로 인해 유휴인력이 발생한것도 이 제도를 도입하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SDS는 올해 시범적으로 실시하고 직원들의 반응을 보고 계속 실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건설업계에서는 현대산업개발이 '휴가 발령제'를 실시 중이다. 일종의 순환휴직 형태로 한 현장의 업무가 끝나면 다음 현장에 발령날 때까지 최대 6개월간 휴직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휴직 기간에는 기본급만 받게 되며 상여금은 지급하지 않는다. 금강산 사업 부진으로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현대아산은 경비 절감을 위해 전직원 ‘재택 근무’를 검토하고 있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겨울철 관광 비수기를 앞두고 150여명의 직원이 관광사업이 본격화할 때까지 무급 휴직형태로 재택근무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사간 신뢰와 사회적 합의가 관건
업계는 경기불황이 지속될 경우 노사간 극심한 충돌이 불가피한 정리해고보다 유연한 구조조정 방식인 순환휴직제를 택하는 기업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적 노사문화에서 정리해고 등 인위적 인원감축은 노조의 반발과 그에 따른 조직의 분열, 종업원들의 로열티 저하, 기술 노하우 단절 등의 많은 부작용과 조직의 후유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리해고와 비슷한 인건비 절약효과를 가져오는 데다 경기가 좋아져 인력을 다시 채용하는 데 따른 부담도 줄일 수 있어 ‘일석 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지난해IT(정보기술)와 벤처 붐으로 전문 인력을 많이 빼앗긴 경험을 한 기업들이 무엇보다 인재양성 투자에 신경을 쓰면서 숙련된 근로자와 연구기술 인력들을 어떤 식으로든 잡아두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사 신뢰가 부족할 경우 무급휴직제도를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현대건설은 지난 7월부터 무급휴직 신청을 받고 있으나, 현재까지 희망자 수가 10명 정도에 불과한 상태다.
한번 무급 휴직을 했다가 회사 경영이 더 나빠질 경우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경총 관계자는 “무급휴직이 한국적인 새로운 불황기 인력관리 방안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노사간의 신뢰와 사회적 컨센서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입력시간 2001/11/28 17:33
김호섭 경제부 dre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