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와 길흉화복] 묘지에 얽힌 전설


선을 베푼 뱃사공

충남 공주에서 북으로 약 2리, 금강(錦江)에 접한 곳에 ‘회룡고조격(回龍顧祖格)’의 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전의(全義) 이씨의 조묘로 이 지방에서는 명당으로 이름나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려조가 생길 무렵, 이 산밑에 이모라는 가난한 뱃사공이 있었다. 그는 자비심이 대단히 깊어 곤궁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가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베풀어 공주 부근에 배회하는 많은 거지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나루에서 강을 건네 달라기에 건네주었는데 얼마 안 되어 돌아와서 또 건네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하길 4~5회, 화를 낼만도 했지만 뱃사공은 한결 같은 얼굴로 친철하게 대했다.

감탄한 스님은 뱃사공에게 상중(喪中)인 것 같은데 좋은 묘지를 발견하였는가 물었다. 뱃사공이 찾지 못했다고 하자 스님은 강 건너의 산을 가리키며 저 산복(山腹)이 길지(吉地)이니 속히 아버지를 매장하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와함께 그곳은 명당이기 때문에 반드시 후에 사람이 파헤치는 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막기 위해 묘혈을 석회로 굳게 만들고 ‘남래요사박상래단지-절지사미지만대화지지(南來妖師朴相來單知-節之死未知萬代華之地)’의 문자를 돌에 새겨 묘의 상층에 묻어 두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이에 이씨는 은혜를 베풀어 온 많은 거지들의 도움으로 스님이 가르쳐 준 곳에 석회로 광(壙)을 만들고 그 위에 석회를 몇층씩 단단히 봉한 뒤 각석(刻石)을 넣고 공사를 마쳤다. 뱃사공의 자손은 부귀영달했다.

그런데 몇대 후인가 이 산을 둘러본 박상래라는 지관(地官)이 일시 발복이 있어도 몇대 되지 않아 일족이 절멸할 우려가 있다면서 이장을 권하였다.

지관의 말을 믿은 자손은 묘지를 파내려 하였으나 묘지 부근은 석회석으로 굳게 봉해져 있어 좀처럼 쉽게 파헤쳐지지 않았다. 더욱이 상층을 벗겨보니 한 장의 각석(刻石)이 나왔다.

그것은 ‘남래요(南來妖)……’ 즉, ‘박상래라는 요지관(妖地官)이 와서 이곳을 흉지(凶地)라 하고 이장을 권할 것인 즉 결코 미혹되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었다. 자손은 선조의 용의 주도한 배려와 참서에 부합됨에 놀라고 다시 본래대로 묻었다.


보검의 칼끝에서 왕비가 속출하다

경기 양주군 망우리 고개 오른쪽으로 민씨의 묘가 있다. 금곡(金谷)에 있는 이씨 왕가 홍릉(洪陵)의 외백호(外白虎)에 해당하는 곳으로 ‘보검출갑형(寶劍出匣形)’이다.

이 묘지는 민씨 13대조가 왕비, 재상을 연이어 낸다하여 족분(族墳)의 땅으로 선정했던 것이라 한다. 그 중 보검의 끝에 쓴 묘의 자손은 더욱 영달했다고 한다(보검의 칼몸도 양쪽이 모두 좋지만 검은 뭐니뭐니 해도 칼끝이 뾰쪽할수록 칼로서의 가치가 있다.

특히 이 보검은 출갑형(出匣形), 즉 갑 속에서 나와 있는 형세이기 때문에 그 끝이 가장 유력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과연 대(代)를 지나면서 고관대작이 속출했고 이씨 왕가 3대에 걸쳐 왕비를 냈다. 잘 알려진 이조 제26대 고종(高宗)의 부친인 흥선대원군 하응(昰應: 1820~1898)의 비(妃) 민씨, 고종의 왕후(王后) 민비, 고종의 첫아들 제27대 순종(純宗)의 왕비 민씨는 모두 이 민씨 가에서 나왔다.

고종이 금곡의 홍릉을 왕릉의 묘지로 선정할 때에 그곳에서부터 보이는 범위(묘지를 중심으로 20리 안)의 땅에는 묘지 쓰는 것을 금하고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다른 곳으로 이장시켰다.

이때 이장의 수난을 당한 묘지는 660여개에 이르렀으나 단 하나 민씨의 묘지만은 그대로 두었다. 이것은 고종의 어머니가 민씨이고, 고종의 왕비도 민씨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묘에 손을 대는 일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점도 있지만 세력있는 왕비 민씨의 체면을 세워 준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묘지는 더욱 유명해졌다.


생기를 뽑힌 명당

경북 안동에 선조(宣祖)시대의 유명한 학자 김성일(金誠一)의 묘가 있다. 이묘지는 유명한 사람의 묘인데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김성일이 죽자 그의 자손은 멀리 한양에서 그 당시 풍수의 제일인자라는 지관을 초빙하여 묘지선정을 부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관은 촌 양반의 초청에 쉽게 응하지 않다가 거듭된 부탁에 기일(期日)보다는 늦게 도착했다. 이에 분개한 김씨 일가 사람들은 지관의 늦음을 질책하고 먼길을 온 수고에 대한 위로는 커녕 곧바로 산으로 데리고 가 묘지선정을 재촉했다.

서울에서부터 먼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늦음을 질책받고 곧바로 묘지 선정을 재촉당한 지관은 내심 불쾌했지만 자신의 권위를 생각해서 서투른 선정은 할 수 없었다. 이곳저곳을 조사한 끝에 ‘금계포란형’의 명당을 찾았다.

묘혈을 파고 관을 묻는 단계에서 흙 속에 묻혀 있던 탕건암(宕巾岩)을 파내고 묻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이 혈중(穴中)에 와 있는 용(生氣)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바위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이 내룡은 더 이상 혈중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이 바위를 그대로 두고 매장했다면 발복은 대단히 풍부했을 것이지만 지관을 홀대하는 바람에 묘지의 외형은 금계포란형이지만 실속이 없었다고 한다. 탕건암은 지금도 이 묘지 근처에 버려져 있다.

수경 최전권 수경철학원 원장

입력시간 2001/12/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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