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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고 분하고…쏟아지는 진정

억울하고 분하고…쏟아지는 진정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관료조직에 등 돌린 없는 사람들의 '새 희망'

11월 29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501호, 국가인권위원회진정 접수창고. 문 연 지 사흘째다.

J(49ㆍ사업ㆍ인천 강화군)씨가 진정서를 작성하고 있다. 1년전 돌연 이민가버린 동업자를 재수사해 달라는 내용이다. 자신의 지분 4억5,000만원을 빼 돌려 뉴질랜드로 달아났다는 주장이다.

사문서위조, 사기, 횡령, 배임 등 혐의로 관할 지청에 고소했지만, 담당 수사관은 수사는 뒷전으로 한채 합의를 종용할 뿐이었다. “가해자와 수사관이 결탁한 게 아니고 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답답한 마음에 평소 안면이 있는 기자한테 마지막으로 하소연해보기도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인권위는 뭔가 다르겠지”기대

“청와대에 진정해 봤자, 검찰 통보부터 시작해서 뻔한 수순만 되풀이 될 뿐인 걸요.” 그는 “인권위원회는 그래도 뭔가 다르겠지 싶은 마음에 왔다”며 못 다 채운 진정서를 메꿔가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정장 차림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또다른 J(37)씨. 패션사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지난 10월 13일 모 경찰서 형사 6명에게 끌려가 폭행당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도 보도됐지만, 사법 당국의 속시원한 결말 없이 망각속에 파묻혀가고 있어 인권위를 찾았다.

불법 증축 신고를 받고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온 경찰이 연행 당시 반항했다는 이유로 J씨를 경찰서 안에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것. 경찰은 그의 손과 발을 묶는 것은 물론, 팬티 차림으로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변호사 선임 요구도 묵살됐고, 네끼를 잇달아 굶었다. 수갑을 채우려는 것에 저항하다 손목의 핏줄이 터지기도 했다.

그가 구금ㆍ폭행당하다 풀려 난 것은 33시간 뒤. 공무집행방해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검사가 영장을 기각한 것이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 경찰을 고소했다.

피소 사실을 안 경찰은 “욕하고 시비 건 것은 당신이 먼저“라며 맞고소했다. 이후 조씨의 진정은 청와대ㆍ한나라당ㆍ천주교 인권위원회 등이 계속 됐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인권위 출범 소식은 가뭄에 단비였다.

“관료화된 정부 조직에 신물 났어요.” 여기 오기까지, 보건복지부, 국회내 보건복지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지에 소원 수리를 요청했으나, 공교롭게도 모두 “검토중”이라는 답 이상을 들을 수 없었던 박재구(40ㆍ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총학생회장)씨.

영국이나 미국처럼 한국도 사이버 대학(행정용어로는 ‘원격대학’)에서 취득한 학점을 자격 취득 조건으로 인정하라는 진정을 29일 접수시켰다.

한국 디지털대학, 세계 사이버 대학 등 국내 9개 사이버 대학 수강생인권위 명의의 집단적 법률 개정 청원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소외받는 사람들의 마지막 버팀목

주식 투자를 해서 근근이 살아 가는 지체ㆍ언어 장애인 C(42)씨. 부모 유산을 증권사 3곳에 분리 투자해 생계를 이어 오던 그는 최근 한 증권사가 투자금 700만원을 빼돌렸다며 업무상 횡령 혐의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C씨는 청와대 인터넷에 자신의 처지를 4차례 올리는 등 이 사건이 자신의 일로서만 끝날 수 없다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다. 장애인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던 사건이다.

지체장애인 4급 J(50ㆍ노동)씨도 지난해 7월 당했던 교통 사고 수사가 잘못됐다며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난 사고에서 피해자인 자신이 가해자로 둔갑됐다는 주장이다.

또 경찰 조사 과정에서 형사가 자신에게 어떤 폭언을 하고 어떻게 폭행했는지, 진정서가 몇장이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진정인 중 더러는 더 이상 추락할 데가 없다.

1992년 11월 대낮에 한강대교 난간에 올라가 시위를 벌여, 졸지에 화제의 주인공이 됐던 P(47)씨도 28일 이곳을 찾았다. 91년 핫도그 행상을 하던 부인의 끓는 기름통을 차가 덮쳐 2, 3도 중화상을 입는 횡액을 당했다.

그러나 경찰이 진단서가 조작된 것이라며 허위 공문서 작성 및 동행사 혐의로 자신을 붙잡으려 하 자 한강대교 난간 위에 올라가 일인시위를 벌였다.

청와대에 탄원을 냈으나 고검-대검-지청이라는 빤한 수순이 P씨를 지치게 할 뿐이었다. 그는 “팔자에 없는 법전을 공부하다 보니, 검찰이 특가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주장하며 “관련 의사와 보험사 직원을 다시 불러 재판할 것”을 요구한다.


탈북자의 기막힌 인생유전

"도대체 한국 국적은 언제 됩니까"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으나, 아직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 한 탈북자 K(48)씨는 28일 접수 창구를 찾았다. ‘탈북-밀입국-무국적’이라는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에 얽매인 우리 시대의 빠삐용이다.

1988년 북한 철도국 승무 지도원으로 일하던 그는 열차 사고의 책임 추궁이 죄어 들자, 중국으로 단신 탈출했다.

주중 한국 대사관에 냈던 망명 신청이 외교적 이유로 거부, 한국행 화물선을 타기 위해 베트남으로 갔으나 현지경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95년 목숨을 건 쪽배 탈출로 태안 앞바다에 상륙했으나, 당국은 ‘탈북자임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강제 퇴거명령으로 답했다.

입에 풀칠이나마 하려 일본땅을 밟았던 그는 불법 체류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 2년 옥고를 치러야 했다. 딱한 사정이 아오야기 유키노부(靑柳行信)씨 등 가톨릭 인권단체에서 외국 노동자를 지원해 주고 있던 일본 활동가들에게 알려졌다.

이후 양국 인권단체의 줄기찬 구명 운동 덕에 지난 2월 5일 임시 체류 허가가 떨어졌다.

인터넷에서 ‘탈북자 KXX’를 검색하면 관련 사이트가 수두룩히 딸려 나오는 ‘유명인사’ K씨는 홀아비 신세를 고집한다.

북에 남겨둔 부인과 세명의 자식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29일 김장을 담근 그는, 이번 겨울만은 따스하기를 바란다. K씨는 “북으로 돌아갈 수 없고 남한에서는 내쳐지는 바람에 지금도 수 많은 탈북자들이 국제 미아신세로 떠돌고 있다“고 말했다.

떠돌이 생활 13년 끝에 ‘더 이상 조국은 없다’던 그가 인권위를 만나, 오늘 조국의 품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인권침해 등 피해 구제

국가 인권위원회는 인권침해나 차별 행위에 대해 진정이 들어 올 경우, 조사해 피해를 구제한다. 이 경우, 피해 당사자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제 3자도 피해자를 위해 진정할 수 있다. 28일 창구를 찾은 스리랑카인 P씨가 그렇다.

스리랑카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그는 한국에 돈벌러 왔다 폭행을 당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감내해야 하는 자국 노동자를 구제할 가능성을 가늠해 보기 위해 들렀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라는 피킷을 들고 동남아 노동자들이 시위하는 기사가 실린 코리어헤럴드지(지난해 12월 7일자)를 갖고 다니며 오늘도 청와대앞 등 외국인 노동자 시위 현장을 찾고 있다.

진정자들은 우선 접수 창고에서 10~20분간 사실 조사를 받고 진정서를 작성하면 바로 옆에 마련된 4개의 상담실로 가 더 자세히 면담하도록 돼 있다. 진정 접수는 오전 9시~오후 5시(02)3703-3000. 이메일 human@humanrights.go.kr, 홈페이지 www.humanrights.go.kr

장병욱 주간한국부기자 aje@hk.co.kr

입력시간 2001/12/0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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