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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서울 역촌시장 '김치박사' 서광복 할머니

[인간탐구] 서울 역촌시장 '김치박사' 서광복 할머니

"김치맛은 오묘한 것, 가르쳐줘도 이 맛을 못내"

첨단 가공시설? 그런 건 없다. 명문 학교 졸업장에다 그럴듯한 연구실? 그런것도 없다. 김치 세계화 시대에다 인텔리 김치박사들도 도처에 즐비한 요즘, 서울 역촌시장 ‘김치 박사’ 서광복(66) 할머니는 오로지 김치 가게 하나로 30년 세월을 지켜온 소박한 전문가다.

그러나 그 명성은 만만치 않다. 김치를 사다 먹으면 ‘주부 양심불량’으로 치던 1960년대부터 그의 김치는 불티나게 팔렸다. ‘혀에 착 감기는’ 맛 때문이다.

요즘도 하루에 만들어내는 김치양만 배추 800포기에 약 1.5톤 물량, 그래도 남김없이 다 팔린다. ‘쬐깐한’ 동네 시장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내 김치가 얼마나 맛있냐고? 에이, 그걸 내 입으로 맛있다고 하면 쓰남! 손님들이 맛있다고 해야지. 그래도 그 많은 손님들이 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듣고서 온거야.”

그래서 1년 내내 할머니에겐 김정철 아닌 김장철이다. 만드는 김치종류도 12가지, 깍두기, 고들빼기 등 없는게 없다.

그 산더미 같은 김치를 만들어내면서도 기계와는 담을 쌓았다. 고작해야 마늘을 찧거나 방앗간에서 고추를 빻느라 잠깐 기계 도움을 받는 것 외엔 도와주는 아주머니 8명의 힘을 빌어 씻고, 다듬고, 버무려 포장하는 모든 일을 직접 손으로 처리한다.


‘야물딱진’ 음식솜씨, 김치 팔아 집 장만

전라도 출신으로 타고난 음식솜씨도 있지만, 매사 야무진 성미도 남다르다. 수십년간 반복해온 일이다.

”이래뵈도 거의 중소기업이야. 시장에서 소매로 파는 것 외에도 납품하는 업체가 몇군데나 되거든. 사실 소매로만 팔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그럼 적든 많든 재고가 생길 까봐 좀 손해를 보더라도 업체에 납품을 하는거야. 그래야 전날 남은 김치없이 매일 싱싱한 새 김치를 내놓을 수 있으니까.”

장사에 뛰어든 것은 결혼후인 30때부터였다. 광주에서 태어나 처녀적 잠시 직장생활을 했다가 스물여섯살 때 당시 서울의 한 시장에서 야채상을 하던 남편과 결혼했다.

그러다 갈수록 생활비에 무관심한 남편을 보다못해 자신도 직접 돈을 벌겠다고 시장에 나선 것이 첫발, 집안을 돌보면서 틈틈이 도라지를 다듬거나 술안주용 밤을 깎아가며 모아뒀던 돈을 밑천 삼아 조그만 가계를 얻었다. 보증금 10만원, 월세 6만원짜리, 야채와 기름 등을 파는 손바닥만한 자리였다.

“처음엔 어찌나 창피스러운지, 차라리 전혀 모르는 손님은 괜찮은데 어쩌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내 얼굴이 온통 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모르겠는거야.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팔긴 팔면서도 제발 그 사람들이 다시는 안 와줬음 좋겠다 싶고. 한번은 같은 집 건넌방에 살던 아가씨가 장보러 왔다가 나를 보고 ‘아줌마 어쩐 일이세요?’ 하는데, 하이고,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막 가슴이 벌렁거리네.”

김치 장사를 시작한 것도 7년쯤 야채장사를 하면서 매번 다 팔리지 않은 것들이 아까와 김치로 담궈본 것에서 비롯됐다. 남다른 맛 덕분에 기대이상 손님들의 인기를 끌었고, 차차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금새 불어났다.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부터 그의 김치를 먹어 본 이웃상인들 사이에선 칭찬이 자자하던 솜씨였다.

“특별하게 배운 것도 없어, 그냥 친정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손맛을 물려받았나봐, 처음에 김치를 만들어 팔때도 별다른 것 없이 그냥 평소 하던대로 만들어 내놓은 것 뿐인데 사람들이 다들 맛있다고 했어.”

김치가계는 대단한 성황을 이뤘다. 특히 그 어렵던 시절 무슨 김치장사가 됐을까 싶은 1960년대 중후반, 오히려 요즘도 못 따를 최고의 전성기가 다녀갔다.

서씨의 김치를 사려는 사람들로 가계는 장사진이었다. 하루 매상 180만원, 일을 마친 뒤 옷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면 지폐가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어려웠던 살림에 비로소 집도 장만하는 등, 일도 생활도 그만큼 흥이 나던 때가 없다.

서씨네 가게가 성공하는 것을 보자 원래 야채와 잡화 등을 팔던 시장내 다른 가계들까지 덩달아 김치나 반찬가게로 업종을 변경했다.

역촌시장이 반찬전문상가로 자리한 역사가 그렇게 시작됐다. 모두가 성공했을까? 아니다. 심지어 시장점포와는 비교가 안 될만큼 번듯한 시설을 갖추고 인근에 들어섰던 김치공장들까지도 결국엔 얼마 못 버티고 막을 내렸다.

‘호박김치’등 이색 신개발품까지 개발해 분투한 업체도 있었지만, 할머니의 야무진 손맛엔 당하지 못했다.

그토록 굳건했던 할머니의 김치가게가 순식간에 주저앉은 건 청천벽력 같은 장남의 사고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돕겠다며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달려나와 가게일을 거들고 있던 듬직한 장남, 여늬때처럼 바쁜 하루를 보낸 뒤 귀가전 마지막 가게 뒷정리를 하던 아들은 그날따라 냉장고 물 청소때 튄 물이 전기선에 남아있던 상황에서 무심코 이를 만졌다가 감전사했다.

7년전, 바로 어머니 서씨의 눈앞에서 벌어진 참변이었다. 32세의 나이, 젊은 며느리와 두 손주를 남기고 갔다.

가게 문을 닫은 것도 평생을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들을 잃고 1주일간 휴업, 다시 가게를 열고 나서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채 좀처럼 장사에 집중할 수 없는 사이, 손님들도 서서히 떠나갔다. 게다가 얼마뒤 IMF가지 겹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수입이 거의 없다시피 보낸 시간만 3년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도 이미 떠나간 손님들을 되찾는데는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부터 맛 하나로 일어섰던 가게, 다시 정성껏 김치를 만들고 꾸준히 관리에 신경을 쓰자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실 장사의 성공비결이란 지극히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잘 만들면 손님들 스스로 알아주게 돼 있다.


장남 사고로 잃는 등 고비의 연속

“늙은이가 정말 이 악물고 다시 일어선거지. 그나마 진작에 내 가게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직도 월세를 물어가며 장사를 했다면 그 돈부터 감당을 못해서 진작 쓰러졌을거야.

지금 6평쯤 되는 이 가게도 남들 보기엔 작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 내꺼야. 처음엔 16만원짜리부터 시작해서 하루 1만2,000원씩 일수를 찍어가며 돈을 모으고 모아 꾸준히 자리를 늘려온거지.”

고비를 넘게 해 준 힘은 또 있다. 자신은 야채상도 일찍이 정리하고 수십년 세월동안 변함없이 서씨의 일 한귀퉁이를 든든히 받춰온 남편의 힘이다. 원래 첫 3년간엔 서씨 혼자 새벽장을 보러 다녔었다.

조그만 체구에 큼직한 채소 보따리를 몇 개나 끌고 다니며 좀처럼 태워주지 않는 버스 운전기사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던 서씨. 그 고된 장보기를 결국 남편이 분담했다.

올해 68세인 남편은 요즘도 밤 10시부터 새벽 너댓시까지 가락동과 청량리 시장 등을 누비며 김치재료를 사오느라 밤낮을 바꿔 산다. 평생 억척으로 살아온 부부다. 36세의 둘째 아들 역시 새벽 4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김치배달로 뛰어다니기를 10여년, 그 바람에 혼기까지 놓쳤다.

집안 일을 돕느라 여자친구를 사귈 시간조차 없었던 아들이 어머니 서씨의 마음엔 몹시 안스럽고 안타깝다. 그래도 온 가족이 합세한 덕분에 어려운 고비도 잘 넘기고 살림도 살쪘다.

사실 지금도 수입으로 치면 헛장사를 하는거나 다름없다. 옛날보다 생산물량은 훨씬많은 데도 실속있는 소매 대신 업체 납품 물량이 많아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기 일쑤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업체, 대형 백화점에 물품을 댓다가 적게는 몇백만원, 많게는 천여만원을 떼인 경험도 있다. 한해 평균 1,000만원 적자, 특히 배추값이 폭등했던 지난 여름엔 3,000만원의 적자를 보았다. 그나마 여름에 뼝 뚫린 가계부를 겨울에 가까스로 메꿔놓는 식이다.

“우리 할아버지(남편)도 가끔 ‘이렇게 돈도 안되고 몸만 힘드는 거 뭐하러 하냐’고 한번씩 그러실 때가 있어. 워낙 일이 힘들 때면 가끔 그러셔. 그려면 나는 ‘이걸로 아이들 공부도 시켰고, 우리 가족 밥도 먹었고, 또 일꾼들 월급도 줬으니 그것만으로도 되지 않았냐’고 해.

또 우리 두 노인이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또 뭐하느냐고. 그럼 더 이상 뭐라고 안하시고 이해를 하시지. 사실 나는 우리 일꾼들 제 날짜에 월급을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또 돈도 돈이지만 뭣보다 손님들이 먹게끔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재료비를 아끼지 않다보니 이익이 더 안 남긴 하지만 설령 이익은 좀 적에 보더라도 배달 갔던 아들에게 김치가 정말 맛있다고 손님들이 칭찬했다는 얘기만 전해들으면 그 모든 스트레스가 싹 다 달아나지.”


“김치 맛의 비결은 손맛에 있어”

김치박사에게 진짜 궁금한 것.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김치와는 또 다르다고 치더라도, 그렇다면 비슷한 재료, 비슷한 또는 더한 정성을 투자하고도 보통사람들의 김치가 모두 할머니네 것처럼 맛있지 않은 이유는 왜 그럴까?

일단 다음 몇가지 사항을 점검해보기 바란다. 서광복 할머니에게서 직접 캐낸 비법이다.

1. 값이 비싸더라도 반드시 좋은 젓갈을 쓸 것. 대체로 값이 싼 건 냄새도 고약하고, 금방 담은건 비리고 맛도 없어 결과적으로 김치를 망친다.

할머니 역시 젓갈이 좀 시원찮다 싶을 땐 손님들이 귀신같이 맛을 알고 ‘이번 김치는 전번 것만 못하다’고 사방에서 전화를 걸어온다고.

2. 젓갈은 세가지를 함께 넣는다. 담백하고 시원한 맛을 내는 황새기젓에다 멸치액젓, 새우젓을 배합한다. 젓국은 꼭 달여서 넣는다.

3. 배추도 계절과 재배지에 따라 맛이 제각각이다. 여름엔 강원도에서 나온 고랭지 배추가 으뜸, 가을엔 전라도 배추, 3, 4월 늦은 겨울엔 제주도 배추가 달다.

참고로, 배추도 사람처럼 자란 환경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는지? 경기도 배추는 맛이 쌉쌀하면서도 오래두면 물러지고, 충청도 배추는 무르고 연한 편, 경기도 배추는 다소 맛이 지리고, 전라도 배추는 고소하고 연해 김치재료로 최고다.

4. 양념 재료도 질좋은 순수 토종으로 써야 실패가 없다. 할머니는 시판되는 포장 고추가루를 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수입산 고추가 섞여 있을까봐 직접 좋은 태양초를 골라 산 뒤 빻아서 쓴다.

5. 양념을 버무릴 때 찹쌀풀을 넣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기본.

6. 배추 10포기를 기준으로 갓 3단, 미나리 3단, 대파 1단, 쪽파1/2단, 황새기젓 1근, 멸치 액젓 1kg, 새우젓 2근, 고춧가루 3근 등의 배율로 넣는다.

더 맛있게 하려면 생새우 1.5근, 굴 1근 정도만 넣어도 향과 맛이 좋아진다. 그런데 이런 ‘사업기밀’까지 다 알려줘도 괜찮을걸까? 실전 전문가 서광복 할머니는 이럴때마저 별 욕심이 없다.

“괜찮아요, 나 가르쳐줘도. 어차피 각자 손맛이 다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있는대로 다 가르쳐준대도 막상 만들어보면 나랑 똑같은 맛이 안 나올걸. 평소에도 ‘할머니가 가르쳐주신대로 했는데 똑같은 맛이 안 난다’고 묻는 주부들이 많아요. 그렇게 오묘하니까 김치지. 김치도 개성이 있어요.”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12/0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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