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기름 부은 '복사분쟁'

출판업계·복사업게 저작권 문제 놓고 갈등

1980년대 이후 대학을 다닌 사람치고 학교 인근의 복사점을 이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권 당 2만~3만원 하는 외국 서적을 구입하기가 부담돼 복사점에서 불법 복사한 자료를 가지고 수업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 한국 학술도서출판협의회 회원들이 학술지 및 교재의 복사문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

하지만 이것은 법적으로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아무런 생각 없이 했던 일이 이제는 법적인 제재를 받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국내 학술도서 출판업계와 복사점업계가 최근 일촉 즉발의 대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학술 전문 도서를 펴내는 한국학술도서출판협의회 회원사들은 12월 5일 모임을 갖고 정부에 학술서적과 교재 불법 복사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집단으로 출판 등록증을 반납했다.

한편 그간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던 복사업자들도 올해 8월 가칭 전국카피앤프린팅(C&P)센터협회를 설립, 자체 정화 운동과 함께 출판협회 측의 공세에 조직적으로 대응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재 양측은 서로 자기 입장만을 고수하면 팽팽하게 대립, 자칫 법정 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출판업계 “불법복사로 언청난 피해”

학술 전문서적이나 대학 교재물에대한 불법 복사 관행은 그간 적지 않은 문제점으로 대두돼 왔다. 학술 서적 출판업계는 ‘교수나 유명 저자들에게 막대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서적을 제작해도 불법 복사점들 때문에 책 판매가 안된다’며 당국에 철저한 단속과 대책 마련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그로 인해 지난해 7월 문화관광부장관의 허가를 받아 저작물 이용자로부터 저작권 사용료를 징수하고 이를 저작권자에게 분배하는 일을 전담할 한국복사전송권센터라는 사단법인이 설립됐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한국학술정보주식회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한국방송작가협회 등 6개 단체가 공동 출자해 만든 한국복사전송권센터는 전국 복사점을 점포위치나 매출 규모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눠 연간 일정액의 저작권료를 받은 뒤 그것을 6개 단체에 배분하고 있다.

현재 서울 소재 대학 구내 복사점은 연간 42만원, 대학 외부 업소는 36만원, 지방 소재 대학 구내는 30만원, 대학 외부는 24만원 등 정액제로 저작료를 받는다.

전국에는 약1,000여개의 중소 복사점이 있는데 이중 현재 약 700여 업소가 한국복사전송권센터에 가입돼 있다. 한국복사전송권센터에 가입된 복사업자들은 한서적의 5% 이내에서만 자유롭게 복사를 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이번에 학술서적 출판업계와 복사업계가 정면 대결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극심한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업계가 자구책으로 불법 복사를 보다 강력히 단속ㆍ처벌할 수 있는 ‘출판 및 인쇄진흥법안’의 개정을 추진하면서 부터다.

이 개정안에는 그간 사법 당국이나 관계 공무원에게만 주어지던 불법ㆍ 유해 간행물에 대한 수거 또는 폐기 조치 권한을 문화관광부장관의 위임 절차를 거쳐 시ㆍ도지사나 간행물윤리위원회 또는 관련법인이나 단체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출판협회나 한국복사전송권센터에 불법 복사를 감시하거나 압수ㆍ수색할 준사법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한국학술도서출판협의회 강희일 회장은 “복사업자들의 불법 복사 폐해로현재 70여개 협의회 회원사 중 이미 10여개가 도산했고 10여개사가 거의 폐업 상태에 있다”며 “사법 당국이 나서 불법 복사를 뿌리 뽑는 것이 최선책이지만 국내 여건상 어려워 이런 자구책으로라도 불법 행위를 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내 학술 전문 출판업계가 고사함은 두말할 나위 없고 학술 저서 조차 나오기가 힘들어 진다”고 주장했다.


복사업계 “불법 온상인양 매도”

이에 대해 복사업자측 단체인 C&P센터협회측은 사법 기관이라 할지라도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없으면 압수ㆍ수색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는 법치국가에서 관련 단체에 준사법권을 주는 것은 위헌이라면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그간 한국복사전송권센터 등이 복사점을 불시에 침입하여 불법적인 압수ㆍ수색을 하는가 하면, 자의적으로 만든 저작권이용료 계약서를 작성해 복사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체결하라고 강요해 왔다고 주장한다.

▷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졌던 학술서적이나 교재의 복사가 더 강력한 법적인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학 도서관 복사실에서 복사를 의뢰한 학생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김명원/사진부기자>

C&P의 이원근 회장은 “일부 불법을 저지르는 업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상당수 복사점들이 자체 정화를 통해 불법 복사를 근절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상황인데 마치 출판업계 불황의 책임을 전적으로 복사점에 전가하고 불법의 온상인양 매도하는것은 부당하다”며 “더구나 복사업계를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도 않은 채 초헌법적인 법안을 만들어 영세한 복사업계를 고사 시키려는 것은 강자의 횡포에 다름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이런 양측의 첨예한 대립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0년전만 해도 출판업계와 복사업계는 어느 정도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IMF 이후 전반적인 출판업계의 불황에다 최근 2~3년 사이 인터넷이 각 가정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출판계와 복사업계가 함께 된서리를 맞게 된 것이다.

이제 웬만한 서적이나 자료는 안방에서 인터넷 웹 서핑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데다 프린트까지 널리 보급돼 그 자료를 언제든 출력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첨단 IT 산업의 대중화가 서적과 복사 업계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출판업계 한 관계자는 “150명이 수강하는 지방 대학의 한 수강 과목용으로 100여권을 보내면 팔리는 것은 복사용으로 쓰일 2~3권에 불과하다”며 “나머지 학생들은 마스터 제본을 하거나 인터넷에서 다른 자료를 다운 받아 공부한다”고 하소연 했다.

복사업계 관계자들도 “최근 2~3년 사이 인터넷 보급이 늘면서 일반 복사점의 매출이 30~50% 정도 줄었다”며 “대학 구내를 제외하곤 거의 다 적자를 면치 못해 수 년내 절반 정도의 복사점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료 지불하는 프린트시스템도입 필요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1차원적인 복사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같은 선진국의 경우 ‘복사(Copy)’는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전송(Transmission)’ 시스템을 이용한 ‘출력(Print)’의 개념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적을 단순히 불법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특정 서적 특정 부분의 복사를 하고자 할 경우 이것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중계업자는 출력업자(복사점)로부터 저작권료를 받아 저작권자에게 넘겨준 뒤 복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복사점 같은 출력업자가 소비자에게 소정의 비용을 받고 내용을 프린트를 해주는 방식이다. 이럴 경우 저작권을 보호할 수 있고 소비자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시스템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또한 출판업계와 복사업계 양자간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지금 양측은 서로 자기 주장만 앞세우며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자세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양측이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한발씩 양보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12/12 17:26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