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제한상영관’ 시대 이후의 풍경들

한국영화 제작자 A씨. 그는 심의결과에 잔뜩 화가 나 있다. 다분히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관객을 끌어 모으려는 계산은 있었지만 그래도 ‘18세 관람가’를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제한등급’을 내렸다. “제작비가 10억원이 넘는데 제한상영관에서 틀라니. 그럴바에야 차라리 몇 장면 자르고 일반극장으로 가는 게 훨씬 낫지.

광고도 못해, 비디오로도 출시 못해, 관객 나이 확인도 엄격한 제한상영관을 좋아할 바보가 어디 있어. 미리 심의위원들에게 자문을 구해 가위질을 했으면 이런 비극이 없었을 텐데.”

외화수입업자 B씨. 제한상영관이 생겼다고 일본 로망 포르노를 왕창 수입했다. 처음에는 가격도 싸서 밑져봤자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경쟁이 심해 가격이 두 세 배나 뛰었다.

누군가, 한국 사람들이 아닌가. 조금돈 된다 싶으면 서로 경쟁해 가격만 올려놓는 특기는 오래 전 대기업들이 영화수입을 할 때부터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제한상영관에 걸면 즉각 경찰에 잡혀갈 것 같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제한등급’을 내주면서 내 영화가 형법의 음란물에 해당된다고 통고했기 때문이다. 비디오로도 낼 수가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비디오물로 심의를 신청할걸.

제한상영관 주인 C씨. 잘하면 수익성이 있어 보여 제한상영관을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만큼 관객이 없다. 아무리 앞에 ‘제한’이 붙었다지만 무슨 제한이 이렇게 많은 건지. 광고도 못하지, 홍보도 못하지, 언론은 저질이라고 한 줄도 소개하지 않지.

그렇다고 거액을 들여 잡지를 만들어 뿌릴 수도 없고. 상영작품 구하기도 쉽지않다. 한국영화는 점점 폭넓은 관객층을 위해 등급이 낮은 영화를 만드는 추세이다. 이미지도 안 좋고, 장사도 안되는 제한상영관에 걸려고 30억~40억원 들여 영화 만드는 바보가 있겠느냐고.

외화 역시 마찬가지야. 지가 무슨 영화예술보호자라고 한 장면도 안 자르고 자진해서 제한상영관으로 오겠어. 차라리 잘라 일반극장에서 ‘18세 관람가’로 개봉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데. 예술성?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그러다 보니 할수 없이 거는 영화라는 것이 대단한 포르노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성이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삼류저질 뿐이니. 내가 봐도 한심하니 관객이 들겠어. 찾아오는 관객이라는 것이 이상한놈들 밖에 없어 옛날 실업자나 동성 연애자들의 전용관으로 낙인 찍힌 그런 극장으로 추락하는 건 아닌지.

감독 D씨. 정말 못해 먹겠네. 제작자와 투자자가 이것도 잘라라, 저것도 잘라라. 제한상영관이 생기면서 더 심해졌어. 다 찍어놓고 골치 아프게 자르라 말라 하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말자는 주의야. 가능하면 낮은 등급을 받아야 흥행 가능성 커지니까.

물론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럼 감독의 예술세계는 모두 포기하란 말이야. 선정적이라고 모두 음란은 아닌데, 그런 표현조차 이제는 몸을 사려야 하니까. 이제는 알아서 기는 시대야.

과거 강제로 잘리는 것보다 심해졌어. 그때는 그래도 작가주의에 대한 존중도 있었는데. 표현의 자유를 위해 등급보류를 없애고 대신 제한등급을 둔 것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다니.

어느 TV 코미디물에서 한 개그맨이 ‘동물24시’란 코너를 진행하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처럼. 제한상영관이 들어서면 “아마 이럴 것입니다”. 논란을 거듭하던 제한상영관 도입이 눈앞에 왔다.

여당도 헌법재판소가 ‘등급보류’ 위헌판결을 내리자 별다른 대안이 없다며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제한상영관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이제 곧 영화법 개정이 국회를 통과하면 어떤 형태로든 제한상영관이 생길 것이다.

세계 유례가 없는 국가가 준 포르노성 영화상영을 제도화하는 것이 된다. 여전히 다른 한편(형법)에서는 음란과 풍속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으면서.

<사진설명> 자진삭제를 하고 ‘18세 관람가’를받은 웨인왕 감독의 ‘센터 오브 월드’. 과연 제한상영관이 생기면 자르지 않고 그곳으로 갈까.

이대현 문화과학부 차장

입력시간 2001/12/1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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