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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의문사 1호 故 최종길 교수 부인 백경자

[인간탐구] 의문사 1호 故 최종길 교수 부인 백경자

"비겁한 사람들… 진실은 밝혀진다"

진실을 밝히기란 그토록 기나긴 고통과 인내를 수반하는 일인가? 과연 이것이 참되고 정직하게 살라고 배워왔던 세상의 보답인가?

고 최종길 교수 타살의 혹사건의 유족 백경자(65)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마음이 무거웠다. 28년간의 지독한 싸움. 최근 전 중앙정보부 간부로부터 ‘최 교수가 창밖으로 떠밀려 살해됐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들린 뒤였다.

그 말 한마디를 듣는데 거의 30년 세월이 걸렸다. 유족에게 그것은 전연 새로운 진술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그토록 무지막지한 공권력에 희생된 한 가족이 거의 반평생에 걸쳐 진실을 알리려 애쓰는 동안, 그 이웃인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 가장 힘들 때는 곁에 없다가 이제서야 일제히 쏟아지는 세상의 관심을 유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산의 자택 앞에 다다를때까지도 마땅한 첫 인사조차 떠오르지 않아 고민스러웠다.

요즘 안양의 한 병원에서 의료활동을 펴고 있다는 그녀는 마침 어린 외손주를 돌보고 있었다.

최근 언론보도에 대해 가볍게 인사를 던지자 “그 정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씁쓸히 웃어보였다. “양심대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해꼬지를 할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전에 용서한 일인데, 참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그녀의 품에서 천진난만한 꼬마는 낯선 손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슴 아픈 기억을 곧바로 캐묻기가 잔인해, 생전의 고인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청했다.


“남편은 아직 40대 그대로인데 나만 60대”


- 너무나 긴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고인의 생시 모습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가.

“젊었을때의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단지, 나는 벌써 60대가 됐지만, 남편은 아직 40대 그대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나만 혼자 나이를 먹었다.”


-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고인은 대쪽같은 학자이면서 학생들에겐 민주화 시위때 이불을 싸들고 가 함께 밤을 지샐만큼 정의롭고 따뜻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가정적으론 어떤 남편이었나.

“(이 질문을 받자 백씨의 표정은 금새 소녀처럼 환해졌다.) 아주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이었다. 원래 외국에서 생활을 한 적이 많아 1970년대 당시 가부장적인 한국의 보통 남자들과는 좀 다른 면이 많았다.

바쁜 생활중에도 주말이면 아이들과 잘 놀아주었고, 가족들을 위해 손수 요리를 하거나 내게도 곧잘 꽃을 선물하는 등, 정말 더할나위없이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6남매의 셋째면서 형제간에도 이를테면 교통순경처럼 든든한 존재였다. 그가 떠나자 큰동서가 ‘이제 누굴 믿고 사느냐’며 애닯아했다. 34살에 결혼해 얻은 아들(최광준씨ㆍ 37ㆍ 경희대 법대교수)과는 특히 친구처럼 지냈다.

그 사건을 당하면서 가장 괴로왔던 순간도 과연 이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해야하나, 그것이었다. 그때 아들은 10살, 딸은 8살이었다.”


- 실제로 뭐라고 얘기했나?

“아파서 돌아가셨다고 하자 아들이 ‘갑자기 뭐가 아프냐’고 했다. 딸은 그때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 친구들과 어울려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때라 뭐가 뭔지 모른채 넘어갔다.

그후 평생토록 나는 자식들에게 단한번도 내 입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알고 내게 묻지도 않았다. 아들은 사건 당시 이미 제 사촌형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눈치를 채고 있었다. 자라는 동안에도 서로가 가슴아파질까봐 집안에선 아무도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장례를 치를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는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내가 약해지면 지는거라고,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그들앞에 보란듯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으로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남편의 결백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나.

“남편이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라 처음부터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도 중앙정보부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간첩이라면 어떻게 친동생이 중앙정보부 직원이될 수 있으며, 그후에도 어떻게 조카들이 외국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겠는가. 다들 정보부에서 남편을 고문하다가 죽자 자살로 위장한 것으로 처음부터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당시의 시대상황때문에 아무 말도 못한 채 오랫동안 참고 지낸 것이다.”


- 그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정보부의 발표대로 믿었을텐데, 외부의 시선으로 상처를 받은 일은 없었는가.

“그거야 진실을 왜곡한 정보부의 잘못때문이지 사람들 탓이 아니니 원망하지 않는다. 한편으론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고 위로해 준 분들이 많았다.

사건 당시부터 오늘까지 늘 힘이 돼주셨던 이수성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그의 대학 선후배 등 각계로부터 도움과 위로를 받았다. 외국의 지인들은 물론, 사건 이후 독일대사관에서도 우리를 불러 위로하며 아들이 독일유학을 원할 경우 모든 비용을 대주겠다는 제의까지 했었다. 정말 날벼락처럼 당한 일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비밀이 밝혀질거라는 믿음 하나로 오늘까지 열심히 살았다.”


항변조차 할수 없었던 상황, 홧병얻기도

28년전인 1973년 10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최종길 교수의 나이 42세.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사중이던 중앙정보부에 참고인 자격으로 자진출두한 그 무렵, 부인 백씨는 맹장수술을 위해 입원해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퇴원할때 곧 데리러 오겠다던 남편이 종내 소식이없었다. 남편 없이 퇴원한 뒤에도 도무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후 당시 정보부 직원이었던 시동생 종선(53ㆍ재미 사업)씨가 자신의 오류동 집으로 가족들을 불러모은뒤 ‘놀라지 말라’며 남편의 죽음을 알렸다.

백씨로선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보부에 출두한지 사흘후인 19일 사망, 이로부터 6일후인 25일 정보부에선 언론을 통해 ‘최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한 뒤 7층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유족들은 터무니없는 누명에다 무고한 살인이라는 확신에 치를 떨었다. 최 교수를 아는 지인들 두 평소 독재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최 교수가 고문중 사망하자 이를 자살로 위장시킨 공작정치의 전형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족들은 고인의 시신조차 볼 수 없었다. 고인의 주검은 이미 입관돼 봉해진 상태로 유족에게 전달됐고, 그대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지는 경기도 마석의 황량한 모란공원묘지. 장례행렬때도 영구차의 앞뒤로 정보부의 감시차량이 배치돼 있었다.

영구차가 지나는 운행코스도 서울대 앞길을 절대 거치지 못하도록하는 등 정보부에 의해 철저히 감시, 통제당했다.

서울대생들의 시위를 사전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인 1974년까지도 유족의 집 앞 골목엔 정보부의 감시요원이 지키고 있었고, 그들이 철수한 후에도 보이지 않는 감시와 압박은 계속되었다.

이후 제기된 의학적인 의혹의 근거들은 차치하고라도, 아들 광준씨에 따르면 맨처음부터 조작의 흔적이 역력했다. 난데없는 간첩혐의를 덮어쓰기전, 최 교수는 평소 자녀들에게 6ㆍ25참전 경험담을 들려주며 공산당과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던 반공주의자였다.

또하나, 부친이 사망하기 이틀전쯤 그의 집으로 건장한 체격의 정보부직원 2명이 찾아와 최 교수의 친필로 쓰여진 쪽지를 내밀었는데, ‘이 사람들은 서울대 교직원들이다. 내가 옛날에 받은 편지들과 외국의 지인들 연락처가 적힌 내 수첩을 찾아드려라’는 그 쪽지의 내용에 따라 최 교수의 편지들과 수첩을 건네준 바 있다.

‘아버지는 언제 오시냐’는 어린 광준씨의 물음에 두 남자는 ‘곧 오실 것’이라며 머리까지 쓰다듬어주고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뒤 정보부의 발표 내용에선 ‘다락방 천장을 뜯으니 수첩이 나왔다’는 식으로 ‘화려하게’ 각색돼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사망한 최교수를 간첩으로 몰기위해 정보부에서 마음대로 짜맞춘 각본이었다.

유족은 아무런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서슬 퍼런 1970년대 유신치하의 상황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건직후부터 정보부에선 ‘절대 외부에 떠들지 말라’며 유족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 특히 외신기자들과의 접촉을 철저히 견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워싱턴 포스트지의 한 저명기자가 직접 진상을 듣기위해 집까지 찾아왔지만 끝내 백씨는 가슴에 묻힌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기자를 돌려보낼수 밖에 없었다. 그날로부터 홧병을 얻어 얼마뒤 정신병원에 입원해 며칠간 치료를 받기도 했다.


자식들에 상처 안주려 전학만 너댓번

간첩 자식이란 오명으로 시달릴 것을 염려해 사건 이후 백씨가두 자녀의 초등학교를 옮겨다니게 한 것만 너댓차례. 황급히 첫 학교를 떠나던 날에도 교장선생님은 학부모 백씨의 손을 꼭 잡으며 ‘좋은 세상이 오거든 다시 아이들을 돌려보내라’며 함께 안타까와했다.

다행히 경제적으론 큰 어려움 없이 앞길을 헤쳐나갔다. 의사 면허를 가진 백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며칠만에 곧바로 직장을 구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자녀들을 키웠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과 그날 먹을거리를 다 챙겨놓은 뒤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다시 아이들과 집안일을 돌보는 등, 억척스레 가사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고단한 나날이었다.

사건발생 이듬해인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첫 추모미사를 열렸을때도 정보부에선 유족의 참석을 막았다. 이때 백씨는 골목을 지키고 있는 감시요원들을 피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백화점 쇼핑을 가는 것으로 위장했다.

명동의 백화점 이곳저곳을 한참이나 돌아다니며 행여 있을지 모를 미행을 따돌린뒤 미사집전 시각이 임박할 즈음에야 급히 명동성당으로 찾아가 가까스로 미사에 참여했다. 당시 얼어붙은 사회분위기에선 사제단이나 유족 모두 위험천만한 시도였다.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전기고문 오조작에 의한 타살’의혹 제기를 필두로 최 교수의 사인규명을 위한 움직임은 곳곳으로 번져나갔지만, 번번이 금지된 메아리로 끝났다.

기나긴 침묵의 고통끝에 마침내 1980년대 서울의 봄을 맞았지만, 이미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이라는 또다른 벽과 부딪쳐야했다.

1988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한 재조사 요구로 검찰조사가 진행됐지만 그마저 ‘자살증거도, 타살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애매한 수사결과 발표와 함께 다시 수면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그후 본격적으로 공론화 된 것이 2000년 11월 23일,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한완상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등 총 386명의 명의로 진정이 접수되면서부터 미흡하나마 조금씩 진척이 보이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그간 유족측에서 확보해 둔 자료들을 토대로 약600명에 이르는 탐문조사 및 소환조사끝에 타살가능성을 시인받는 최근의 성과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한참이나 먼 길, 유족들의 답답함은 다름 아니다.


공권력과 맞서 싸운 강한 어머니 모습


- 앞으로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진다해도, 공소시효가 만료(1988년 10월 18일)돼 법적 처벌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에 대한 부인의 생각은 어떤가.

“나라에서 잘못을 했는데 무슨 공소시효가 있는가! 고문한 당사자 개인의 처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인들 어디 자기 혼자 판단으로 저지른 일이겠는가.

하지만 진실만큼은 똑바로 밝혀야 한다. 최근 확보된 증언이란 것도 사실상 겉핥기에 불과하다. 걸핏하면 모른다니 정말 비겁한 사람들이다. 나도 의사지만 당시 부검에 참여한 의사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니, 정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차트라도 뒤져봐야 될 것 아닌가.

양심껏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장본인들은 지금도 괴로울것이다. 그렇게 양심을 속이면서 자신의 자식앞에 어떻게 고개를 들수 있는지 모르겠다.”

백씨는 안방에서 조그만 손수건 보따리를 가져와 최 교수의 마지막 유품을 보여주었다. 정보부 출두 당시 소지했던 손목시계와 이미 오래전에 용도폐기된 500원짜리 지폐 몇장, 그리고 만년필 두자루와 열쇠, 동전 등이었다.

그외 남편의 마지막 체온을 함께 했던 벨트는 아들 광준씨가 가져가 쓰고 있다고 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 민법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광준씨는 그 성품까지도 선친을 꼭 빼닮았다고 백씨는 말한다.

고인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할때만큼은 백씨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 올랐다. 사실상 고인을 둘러싼 외부의 아픈 논의들은 대부분 아들 광준씨가 맡아 온 가운데, 백씨는 생전 강직한 학자로, 존경받는 스승으로 살았던 고인과의 즐거운 추억들을 껴안고 오늘까지 밝은 가정을 지켜왔다.

그 거센 공권력의 힘도 끝끝내 좌절시키지 못한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스며있었다.

대화도중 몇번이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녀에게 다시한번 물어보았다. 지금도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다고 믿는가.

“그렇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들이 입을 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앞으로도 얼마나 긴 인내의 시간을 치르든, 이들 유족은,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의문사 유가족들은 결코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1/12/1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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