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종교개혁이 온천개발에 불을 지폈다

■ 온천의 문화사 (설혜심 지음/ 한길사 펴냄)

요즘 ‘온천’ 하면 중ㆍ장년층이나 찾는 한적한 휴양지, ‘터키탕(증기탕)’ 하면 청ㆍ장년 남성들이 성적 쾌락을 즐기는 장소를 떠올린다. 하지만 18세기 영국 등 유럽에서 온천은 중ㆍ상류 계층들이 휴식과 사교를 겸해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최고 휴양지였다.

1960~70년대 국내에서도 온양 동래 도고 덕산 유성 수안보 등 전국 각지에서 온천이 개발돼 고급 휴양지로 인기를 누렸다. 당시 온천은 부유층의 휴양지이나 신혼 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각종 휴양지들이 개발되고, 해외 여행까지 자유화 되면서 온천은 서서히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터키탕’이라고 불리는 고급 사우나도 국내에선 매매춘의 온상으로 지목됐던 곳이다. 본래 ‘터키 목욕탕’란 19세기 유럽에서 ‘동양풍의 고급 목욕 관습’을 칭하는 오리엔탈리즘 귀족 문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악덕 상인들이 1인용 욕실에 접대 여성을 들여보내 음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매춘 장소로 변질 됐다. 터키탕은 국내에도 도입돼 1990년대초까지 성행하다 최근에는 불법으로 인정돼 음성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17~18세기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던 온천의 변천사를 통해 서양의 역사ㆍ문화를 조망하는 특이한 책이 나왔다. 대학에서 서양사를 강의하는 설혜심 박사가 펴낸 ‘온천의 문화사’(한길사 펴냄)가 바로 그 것이다. 이 책은 레저의 한 형태인 온천을 통해 서양의 역사와 문화, 종교의 변천사를 돌아 본다.

저자는 서양사를 연구하던 중 1550년대 영국에서 갑자기 온천이 생겨난 것에 호기심을 갖게 돼 이 작업에 착수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온천의 발생과 유행이 당시 종교, 사회, 과학,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17~18세기 서양에서 온천이 유례없이 번창한 것은 헨리 8세가 단행한 종교 개혁의 영향이라고 주장한다. 여행과 휴식이라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던 종교 순례가 종교 개혁으로 금지되면서 사람들은 욕구를 분출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온천 휴양지 개발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당시 의술인들이나 온천 지역 주민들이 상업화의 수단으로 광천수가 건강에 좋다는 수(水)치료법을 퍼트리면서 더욱 가속화 했다는 것이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물’에 대한 그간의 신성한 인식을 밀어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적이고 상업적인 접근을 하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산업화로 대량생산이 이뤄지면서 부를 축적한 부유층들이 재산을 과시하고 소비하기 위해 온천을 휴양소로 활용하면서 온천 지역은 더욱 상업화 돼 갔고, 그와 함께 성적 타락도 더욱 심해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터키 배스’의 ‘배스’는 본래 18세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장 도시를 말하는데 이것이 잘못 전해져 오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온천’ 같이 사소한 주제도 심도 있게 파헤치면 한 시대의 역사ㆍ문화를 다른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 작업은 비록 한 분야에 국한된 것이지만 인간의 업적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인정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입력시간 2001/12/1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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