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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김의철(上)

[추억의 LP여행] 김의철(上)

고독한 예술혼에 매몰된 음악세계

김의철을 기억하는 70년대 포크팬들이 몇이나 있을까? 세계기타협회 회장이었던 스페인의 나바스코스와 전설적인 세계적 클래식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수제자 볼로틴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기타리스트가 김의철이다.

그가 부른 읊조리는 듯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곡들중 그나마 대중들의 기억을 간지럽히는 노래는 <마지막 교정>과 <저하늘에 구름따라> 정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 대부분의 70년대 포크가수들과는 달리 포크의 순수한 본연의 정신을 지닌채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음악적 성취감만을 위해 꿋꿋하게 삶을 견지해온 아티스트이다.

그는 지금 양희은의 음악감독으로 품격있는 포크의 완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양희은은 ‘김의철의 기타는 세계적’이라고 거침없이 추켜세운다. 부끄러워서 세상에 내놓지 않은 그의 93년 음반은 양희은의 이야기가 허세가 아님을 증명해준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클래식포크였다. 단순한 포크가락에 클래식의 품격을 더해놓은 발전적 음악형태인 클래식포크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독창적이고 품격있는 김의철 음악의 결정판이다.

김민기조차 타의에 의해 포크를 저버린 지금, 그는 숨겨진 한국포크의 자존심이자 현존하는 포크정신의 희망으로 불릴만한 하다.

한국전쟁때 함경도 원산에서 피난온 부친 김인상과 모친 윤정희 사이의 3남3녀중 다섯째로 부산에서 태어난 김의철. 부친은 원산에서 건축업을 크게 벌이며 많은 성당을 건축했을만큼 유복한 집안이었다. 사촌등 온가족들은 월남하여 서울 신당동의 폐허가 된 고아원을 개축, 함께 살았다. 늘 외로움이 버거웠던 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영원한 개구장이 김의철은 5살때 지붕에 올라가 놀다 '동네에 광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내리다 크게 다쳐 지금도 다리가 불편한 상태. 이때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밤을 새워 한국적이면서 슬라브적 냄새가 물신 풍기는 장중한 장례식곡을 작곡하여 바쳤을 정도. 김의철의 형제자매는 대단한 클래식 예술가로 유명하다.

큰 형은 한국최초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뉴저지 심포니, 뉴욕필하모니 악장을 지낸 금호4중주의 창시자인 한양대음대 관현악과장 김의명 교수이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때 전국 콩쿨에서 대상을 받고 명문 줄리아드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누나들은 피아노와 정치학을 공부하러 독일로 유학을 갔을만큼 뛰어난 재원들이었다.

어려서 다리를 다치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김의철은 중3때 가세가 기울며 내적상념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음악입문은 유아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에 있던 애기 바이올린은 김의철의 장난감이었다. 셋째누나가 대학에 들어가며 구해온 천원짜리 기타소리에 매료되면서부터 기타에 빠졌다. 중3때 이미 10여곡을 작곡했을 만큼 음악성은 타고 났었다.

청소년기는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형제들은 모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부모도 사업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나는등 홀로 한국에 남아 다리절단의 위기를 넘기는 8번의 대수술과 견딜수 없는 외로움과 싸워야했다.

고1때부터 삼촌집에 얹혀 살면서 현실 세계보다는 내적인 안정과 만족을 안겨주는 기타배우기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공부보다는 기타만을 끼고살다보니 70년대 사회분위기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당했다. 수업부족으로 학업중단의 위기에 처하자 외국의 부모로부터 의절을 경고하는 편지가 날라왔다. 심신의 견디기 힘든 고통은 가출로 이어졌지만 삶의 무게에 짖눌릴 때마다 오히려 김의철의 예술혼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좌절보다는 '정신세계에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온통 세상이 멜로디로 꽉 차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더욱 음악속으로 빠져들었다. 실제로 유일한 독집LP에 수록된 모든 곡들은 당시의 감성을 담은 펑범치 않은 감수성과 음악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고교동창 백성조는 '너는 우리나라의 음악을 책임져라. 나는 그림을 책임진다'고 말했을 만큼 김의철의 음악에 홀딱 반했던 절친한 친구. 김의철보다 불우한 처지였지만 그의 따뜻한 격려는 김의철에게 큰 음악적 영향을 안겨주며 순수함을 잃지않게 해주었다.

김의철은 고등학교때부터 음악실 세션작업에 참여했다. 김동석의 음반작업세션을 맡으면서 그의 기타솜씨는 제법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독교방송 김진성 PD와 친분이 생기며 전설적인 포크여가수 방의경이 진행하는 인기절정의 청소년프로 <세븐틴>에첫 방송출연을 했다. 이때 부른 노래는 고1때 작곡한 '저하늘의 구름따라'였다. 범상치 않은 기타솜씨와 싯적인 노랫말을 서정적멜로디로 구사하는 김의철에 게 방의경은 홀딱 반해버렸다.

이때부터 두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며 방의경의 노래반주는 김의철이 도맡아 해주었다.

음악에 넋을 빼앗긴 김의철은 대학진학보다는 창작곡들의 녹음작업을 하며 개발붐으로 들썩이는 반포에 칸 기타스튜디오를 오픈, 본격적인 음악여정으로 들어섰다.

이때가 1973년. 녹음한 모든 곡들이 유신정권의 검열에 좌절당하자 성음 나형구 사장은 곡제목과 가사들을 상의도 없이 수정하여 김의철의 유일한 독집LP <김의철 노래모음-성음,SEL-20-0025,74년3월>을 세상속으로 내밀어버렸다. 첫 독집음반의 불법적 탄생은 천재적 음악성을 지닌 김의철을 대중들과 격리시키는 사망신고일줄을 누가 알았을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1/12/2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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