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본 2001년] 2001년에 추락한 사람들

국민의 가슴에 절망을 쓴 일그러진 얼굴들

2001년은 유난히 루저(loser)가 많았다. 권력, 돈, 명예 등 인생 3대 재산 중 으뜸으로 꼽히는 명예를 잃은 사람이 줄을 이었던 한해였다.

대중 문화의 시대, 누구나 스타가 되고파 하는 이 시대, 어느 스타가 단 몇 달만에 보여준 찬란한 성공과 몰락담에 장안은 귀를 쫑긋 할 수 밖에 없었다. 황수정, 그녀는 자신을 성녀(聖女)처럼 만들어 놓은 여론에 대해 ‘타락할 권리’라도 주장하고 싶었을까?

민주 경찰을 그렇게 부르짖어 놓고도, 정작 자신은 직권 남용 등으로 민폐를 끼쳤던 경찰 수뇌. 다시 권력의 자리에 앉기까지 근 2년을 근신해야 했던 전 장관. 이들은 권력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올해 대입 고사라는 가파른 고갯길에서 거꾸러진 전국 수험생들은 불특정 다수의 이야기일 뿐인가.

이들은 우리에게‘온몸으로’ 무언가를 말해주었다.


황수정(-예진 아씨,너마저…)

일반 국민을 가장 놀라게 만든 사람으로 단연 인기탤런트 황수정(31)씨가 꼽힌다. 사실 히로뽕 등 환각제를 복용하다 적발된 연예인들은 많다. 연예계와 히로뽕은 그다지 큰 뉴스거리도, 화제도 못 될 지경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녀로 오자, 반응은 사뭇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애인에게, 친구에게 돌연한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불같이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고 심지어 허무감까지 호소하는 팬들도 있었다.

그의 히로뽕투여 소식은 문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지난해 공전의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허준’에서 예진이란 의녀로 분, 보여 주었던 청순한 여성상이 너무 강하게 각인됐던 걸까. 평소 알고 지내던 강모(34·유흥업)씨와 함께 히로뽕을 투여한 혐의로 11월 13일 검찰에 구속되자 약속이나 한 듯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예진 아씨, 너마저!”.

더욱 억장이 무너뜨렸던 대목은 황씨가 검찰의 영장 실질 심사 자리에서 했다는 말.

“강씨가 양주에 약물을 탄 것은 알았지만 마약류가 아닌 최음제인줄 알았다.”이는 곧 ‘예진 아씨는 성적만족을 높이기 위해 최음제를 즐겨 마신다’로 뜻으로 사람들은 알아 들었다. 그것은 마약복용이란 사실 이상의 치명타를 안겨줬다.

황씨는 재판과정에서 검사와 한바탕 설전을 벌여 또 한번 이목을 끌었다. 범죄사실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검사에게 “검사님은 아이큐가 얼마예요”, “소설 쓰고 있네요”라고 되받아 친 것.

이에 대한 견해도 두 갈래. ‘죄인이 감히…’ ‘막간다’는 등의 비판과 함께 ‘얼마나 억울하면’이란 동정론과 ‘정말 히로뽕인지 모르고 마셨다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을 망정 법률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 검찰이 한건을 올리기 위해 오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하여간 이바람에 황씨는 여러 인터넷 사이트가 선정한 ‘올해의 엽기녀’타이틀을 거의 석권하다시피 했다. 그 어느 짝사랑이 이보다 더 씁쓸할까.


이무영 (쓰러진 오뚜기)

모든 국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철창 신세까지. 이무영 전 경찰청장은 권력 무상의 쌍곡선을 한몸으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오뚜기’로 다가왔다. 경찰조직에서 퇴임을 준비하는 자리로 알려진 경찰대학장에서 1999년초 서울경찰청장에 임명되면서 얻은 별명이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DJ정권 출범과 함께 빛이 난 탄탄한 여권인맥이 새삼 빛을 발한 대목이었다.

특히 경찰청장취임과 동시에 ‘경찰 개혁 100일 작전’을 전개하는 등 경찰의 체질개선을 통해 국민들에게 가까이 갔고, 시위현장에 여경관을 투입하고 무최루탄 원칙을 확립시켰다. 당시 여경관의저지선은 ‘립스틱 라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경찰총수 자리에서 퇴임한 지 한달만인 12월10일 수지김 사건 수사 중단과 관련, 김승일 전 국정원 대공수사국장과 함께 전격 구속됐다. 적용된 혐의는 직권 남용, 직무 유기, 범인 도피 등.

‘수지김 피살사건’수사를 중단한 것이 국가정보원과 경찰청 수뇌 간부 간의 ‘교감’때문이고 그 정점에 그가 있다고 검찰이 판단한 것.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수지김 사건으로 전북도지사 출마를 공언했던 그의 꿈이 사실상 무산됐다.

수지김 사건은 국정원과 경찰 뿐만 아니라 87년 간첩사건으로 조작할 당시 검찰, 외교부도 이를 알았다는 진술과 주장이 제기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수지김의 전 남편 윤태식씨는 14일 법정에서 당시 검찰도 간첩조작 사실을 알았다고 진술함으로써 검찰을 머쓱하게 했다. 검찰은 이를 부인하고 있으나 그동안 전 총수의 구속에 ‘조용’하던 경찰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한편 이씨는 재임 시절, 독선적인 업무스타일과 정실인사로 조직내에서 불만을 사기도 했다. '발탁인사'라는 말로 포장한 인사에 대해 조직내부에선 그가 떠난 뒤 "역대 어느 청장때보다 영호남의 인맥갈등이 심화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해찬1세대 (“우리는 속았다”)

“우리는 마루타였습니다.” 11월7일 수능 시험을 치른 고 3수험생들. 도대체 어떤 허탈감과 심리적 공황 상태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스스럼 없이 생체실험용 인간 마루타(丸木ㆍ통나무)로 비하했을까?

애초 정부가 발표했던 2002 대입제도의 골격은 이러했다. 수능의 변별력과 비중을 낮추고 학생부 성적과 면접을 중심으로 수험생의 특기와 적성을 평가해 선별한다는 것.

그러나 수험생들의 학업 수준을 감안하지 않고 터무니 없이 어렵게 출제, 수능 시험의 영향력은 결과적으로 더욱 커진 꼴이 되고 말았다. 전체평균점수가 지난해보다 66.5점이나 하락했다.

지금 사이버공간에는 이일모(이해찬 1세대 전국 동기 모임)를 비롯, 이들의 원성이 거대한 세력으로 다가 오고 있다.

‘어쩌다가 팔삼년생 저주받은 우리학년/ 이해찬이 누구더냐 우리대학 간다면서/ 지금이판 개판이다 니가한번 풀어봐라/ 나는 이제 무엇먹나 내생계를 책임져라’. 고별사라는 ID의 수험생이 지은 시조의 말미는 동년배의 원성을 이렇게 압축한다.

지난해는 물수능, 올해는 불수능이란 비난에 출제 당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는 명제가 있다. ‘난이도는 귀신도 못맞힌다’는 말. 변명하자는 건지, 부아만 더 돋우자는 건지.

교육 관계자들은 대입제도의 목적에 부합하는 과학적ㆍ체계적 수능 관리 시스팀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해마다 한달 동안 출제 위원들을 합숙시키면서 후닥닥 출제를 일임하는 현행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내년은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국정원과 검찰 (더 이상의 망신은 없다)

‘추락의 끝은 어디인가.’ 올 한해 국정원과 검찰은 이 말을 두고두고 되씹어야 했다. 권력기관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두 기관에게는 ‘악몽’이었으나 국민들에게는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양 기관의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사퇴해야 했으며 수뇌가 물러나거나 탄핵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두 기관의 망신은 일부 조직원들의 본분을 저버린 행태에서 기인한다. 나라를 생각하기보다는 사익을 앞세웠다. 조직에서는 이를 알고도 은폐하려 했다가 문제를 확대 재생산 한 꼴이 됐다.

‘끼리끼리’의 패거리 행태가 브레이크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 브레이크가 없으면 충돌 뿐이다. 수사대상에 오른 한때의 실세들은 ‘음모’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언론에 권력암투라는 말이 오르내리는 이유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상황이다.

성역이다시피하던 국정원은 수지김 사건 간첩조작에다 경찰에 대한 수사중단 압력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게다가 이용호ㆍ진승현 게이트 등에 고위간부들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였다. 국정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8ㆍ15 평양축전과 관련, 임동원 원장이 낙마하면서 부터였다.

검찰은 각종 정ㆍ관계 로비의혹 사건의 은폐ㆍ축소ㆍ미봉 수사 의혹이 불거지면서 곤욕을 치루었다.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했던 임휘윤 전부산고검장 등 검찰간부 3명이 사상 처음으로 구성된 특별감찰본부 조사를 받고 사표를 냈다.

또 현 검찰총장 동생의 연루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앞으로 있을 특검의 수사에서 검찰이 또 어떤 낭패를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박지원 안정남 (실세에서 야인으로)

박지원 안정남…. 현 정권의 대표적인 실세들이었으나 지금은 야인으로 연말을 보내고 있다.

현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장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차례로 지내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해오던 박지원씨는 민주당 쇄신파동 속에서 자신의 거취 문제가 제기되자 자리를 또 내던졌다.

그의 사퇴는 이번이 두번째. 지난해 신용보증기금 대출부정사건 연루의혹이 불거지자 사표를 내던지고 검찰의 수사를 받았던 그였다.

본인의 표현대로 '거물(巨物)'이 아닌 '거물(去物)', '실세(實勢)'가 아닌 '실세(失勢)'가 됐다. 내년 양대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그의 말대로 그가 실세(失勢)인지는 두고봐야 한다는 것이 정치권의 시각이다.

안정남씨는 국세청장 시절 언론사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한 공로로 9월 7일건교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재임 23일만에 물러나야 했다. 지병인 평활근육종 재발이 그의 사퇴 이유였다.

그러나 국회 건설교통위 국정감사에서 서울 강남지역 부동산 취득과정에 의혹이 제기된 이후 사퇴가 전격적으로 이뤄져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하면서 일부 언론들의 표적이 되면서도 굳건하게 버텼으나 강남의 ‘가족타운’이 결정타가 됐다는데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언론탄압’ 공방을 불러 일으킨 언론사상 초유의 대대적인 세무조사로 동아일보 김병관 전 명예회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조희준 전 국민일보회장이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12/20 17:42


장병욱 주간한국부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