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 불씨에 '바람' 솔솔

여야 중진 5인이 불 지피자 한나라당 소장파 본격 가세

정가에 개헌론이 다시 점화되고 있다.

5년 단임제인 현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미국식의 정ㆍ부통령제를 도입하자는 것이 개헌론의 주요골자. 지난해부터 시작해 올 상반기 까지 여권 일각에서 제기된 개헌론은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불씨가 거의 꺼진 상태였다.

죽었던 개헌론을 다시 살린 것은 김덕룡 이부영 정대철 김근태 정동영 의원등 여야중진 5명. 정동영의원을 제외하면 이들은 여야 개혁성향 의원들의 모임인 ‘화해와 전진포럼’ 소속으로 그간 나름의 신뢰를 쌓아온 상태.

당내에선 주류쪽에 서지 못하고 한켠으로 비켜서 있지만 정치적으로 ‘큰뜻’을 품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이 12월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개헌론을 공식 주장하자 정가에선 “대선을 1년 앞두고 되겠느냐” 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기류는 여당이 아닌 야당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지금껏 개헌론은 여당의 전유물 이다시피 했다.

청와대 역시 개헌을 적극적으로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원칙적인 찬성론의 입장에 서있었고 이인제 고문 등 여권의 후보군들도 개헌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야당은 이를 ‘정계개편용’이라고 몰아붙이며 단호히 반대했다. 당내에서 개헌론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 됐고, 개헌을 요구하는 것은 ‘해당행위’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원들도 이런 당의 입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힘 실은 박근혜 부총재, 초선 의원들 동참

그러나 이회창 총재에게 도전장을 던진 박근혜 부총재는 11일 경선 출마선언을 하면서 “4년 중임제를 하는 것이 좋겠다”며 “개헌을 지방선거전에 할 수 있으면 좋다”고 원칙적인 찬성론을 밝히며 5인 모임의 개헌요구에 가장 먼저 힘을 실었다.

더욱이 특이한 현상은 지난해 개헌 요구 때 꿈적도 하지 않았던 한나라당 소장파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가세할 경우 한나라당 내에서도 상황은 달라진다. 그간 머리(김덕룡ㆍ이부영ㆍ박근혜)만 있다가 팔 다리가 생겨나면서, 개인이 아닌 그룹, 극소수의 의견이 아닌 개혁 소장 세력의 집단의견으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열린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당내 초선 의원간의 간담회. 마이크를 잡은 개혁성향의 오세훈 안영근 김영춘 의원 등 상당수의 의원이 개헌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 지금 헌법 권력구조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이다. 이는 5공화국 때 독재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번 기회에 권력 집중적인 대통령제를 완전 재검토해야 한다. 명실상부하게 3권을 보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여권에선 정치개혁 운동이 벌어지면서 정부통령제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정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발상을 해야 한다. 그것이 한나라당이 사는 길이다” 라는 논지였다.

또 18일 한나라당내 소장파 원내외 위원장 모임인 미래연대가 다시 개헌론의 공론화를 추진키로 했다. 이들은 이날 열린 송년모임에서 내년 1월 중순께 개헌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고 개헌 문제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기로 했다.

세미나를 통해 당내의 개헌논의를 공론화 하겠다는 취지이다. 이회창 총재는 초선 의원들의 요청에 “오늘은 듣기만하는 날”이라며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여전히 부정적인 한나라당 주류그룹=이총재의 측근 그룹, 즉 한나라당의 주류들은 개헌론에 대해 상당히 신경이 곧추 세우고 있다.

최근 장광근 수석부대변인은 한광옥 민주당 대표의 잦은 개헌 발언에 대해 논평을 내고 “김대중대통령의 의중반영이자 정계개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서 “지금은 개헌론이나 들먹일 때가 아니라 경제가 무너지고 권력비리로 국가기강이 무너지는데 대해 반성해야 할 때”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주류측 "왜 이시점에" 의혹의 시선

이 총재의 측근들은 “대선이 1년도 안남은 시점에서 왜 또 개헌논의가 불거지느냐”며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 측근은 “개헌논의 차제가 현재의 권력구도를 요동시킬 소지가 있다”면서 “ 이 와중에 내각제니 뭐니 하며 제3의 논의가 개입될 소지가 크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개헌론은 국민들로 하여금 엉뚱한 선택을 강요하는 논의로 번질 수 있고 국력을 유실시킬 수 있다”고 덧붙이며 “더욱이 근본적으로 개헌논의를 빌미로 ‘창(昌) 대 반창(反昌)’ 구도로 만들려는 저의가 분명히 숨어있다”고 짚었다.

이회창 총재측의 입장에선 현재의 구도대로 가면 내년 대선에서 안정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다시 돌출한 개헌론은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여러 변수를 만들어 판을 흔드는 ‘교란작전’이거나 어떻게 해서라도 이 총재와 각을 세워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려는 반창인사들과 여권 특정세력과의 연합전술로 판단하고 있다.

심지어 여권 핵심부에서 이런 판을 은근히 조장, 판세를 분석하며 다음 수를 노리고 있다는 경계론도 나온다.

한나라당 주류 그룹에선 특히 대선이 1년도 안 남은 시기에 개헌론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실현불가능한 이야기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총재의 직계그룹으로 분류되는 홍사덕 의원은 개헌론에 대해 “불가능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그는 특히 “내년만해도 큰 선거가 2건이 있다. 월드컵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또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욱 짚고 넘어갈것은 개헌은 그야말로 나라의 장래를 바꿀 중대사이다. 개헌 논의가 본격화 되면 온 국민의 시선이 여기에 집중될 것이다. 국민들의 에너지가 온통다른 데로 쏠려버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비판론을 폈다.

그러나 5인 중진 등 개헌론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김덕룡의원은 “여야합의만 하면 물리적으로 개헌이 안될 이유가 없다. 개헌을 하겠다고 뜻을 모으면 선거일정을 조정해 지방선거를 대선과 동시에 치루면 된다”고 말했다.

정대철 의원도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개헌의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가에선 이회창 총재의 선택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총재는 지금까지 개헌론에 대해 여당의 정치적 악용 가능성, 정ㆍ부통령제에 대한 정치적 부담 등을 의식해 부정적 입장에 서왔다.

김덕룡, 이부영의원 등의 개헌론에 대해선 “2인자 경쟁에서 뒤진 사람들이 내놓는 이야기”라고 일축하는 분위기.

그러나 야당 내에서 개헌론이 더욱 거세질 경우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웠던 ‘여권의 정계개편용’ 이라는 반대 명분도 희석될 수 밖에 없고, 여야의 개혁세력들이 연대해 ‘개혁’의 이름으로 개헌을 요구할 경우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개헌에 반대하는 것은 반개혁세력’이라는 역공을 받을 경우 정치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임기중 개헌' 카드 등 본격 공로화 조짐

정치권에선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개헌이 시기적으로나 정치상황으로나 현시점에서 어렵다면 ‘임기중 개헌’이라는 카드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소장그룹인 미래연대쪽에서도 ‘대선전 개헌’ 보다는 ‘개헌 공약’쪽으로 기울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한나라당 주류그룹에선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지만 개헌공약론을 꺼내는 것 자체가 공약론으로 비화될 우려가 있다”며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이 강하다.

그러나 개헌론을 주도했던 중진 5인이 연초 대규모 개혁인사 모임을 준비해 개헌론을 다시 공론화하겠다고 공언하며 전면전을 준비중이다.

대선을 1년 앞둔 현시점에서 다시 불거진 개헌론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 이 총재는 어렵고도 골치아픈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태희 기자

입력시간 2001/12/28 11:31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