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이 악문 검찰

명예회복에 강한 의지 "우리도 살아야겠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12월 21일 오전 신광옥 전 법무부차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결정을 알리던 서울지검 관계자는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조직의 대선배를 ‘고작’ 1,800만원 수뢰 혐의로 구치소로 보내야 하는 데 대한 인간적 고뇌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수사의지와 수사능력에 대한 총체적인 비난이 누적돼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져있는 현재의 검찰로서는 쉽사리 ‘선처’를 베풀 입장이 아니다.

검찰이 이례적으로 국정원 인사 및검찰 내부인사까지 가차없이 구속시키는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조직붕괴의 위기감’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이제 검찰은 실추된 명예의 회복을 위해 정치권에까지 비수를 들이대려 하고 있다.


1라운드 수사… 오랜만에 ‘전과’

한 달 동안 숨가쁘게 달려왔던 검찰의 ‘진승현 게이트’ 재수사는 23일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끝으로 일단 ‘첫번째 라운드’를 마무리했다.

이 사건이 다시 불거진 계기는 11월 14일 ‘김 전 차장이 지난 2월 부하들을 동원, 진씨의 로비스트였던 전 MCI코리아 회장 김재환씨를 폭행했다’는 한국일보보 도.

이후 지난해 검찰이 전 국정원 과장 정성홍씨에게 4,000만원, 민주당 김방림 의원에게 5,000만원을 건넸다는 김씨의 진술을 확보하고도 수사를 벌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은 증폭됐다.

이렇게 되자 그 동안 ‘의혹만으로는 수사를 벌일 수 없다’던 검찰도 결국 ‘김 의원과 정씨의 수뢰의혹에 대한 재수사’라는 단서를 붙인 채 서울지검 특수1부(박영관 부장검사)에 사건을 배당, 수사에 착수했다.

2주일 동안 MCI코리아 부회장 진승현(구속)씨를 집중추궁하는 한편 수표추적을 계속해 온 검찰은 결국 진씨로부터 2000년 4~7월 정씨에게 현금과 수표 1억원과 법인카드를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 지난 12월 2일 정씨를 구속했다.

이어 나흘뒤인 6일에는 진씨의 변호사 선임비용 중 일부를 횡령한 M교역 대표 박모씨가, 15일에는 민주당 간부 최택곤(57)씨가, 22일에는 최씨를 통해 진씨의 돈을 받은 신 전 차관이 차례로 검찰 수사망에 걸려들어 구치소로 향했다.

그리고, 23일 ‘진승현게이트’의 ‘몸통’으로 알려진 김 전 차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됨에 따라 1단계 수사는 막을 내렸다. 매번 ‘뒷북치기 수사’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는 비난을 받아온 검찰로서는 오랜 만에 ‘전과’를 올린 셈이다.


산 넘어산… 이제부터가 본게임

그러나, 진짜 수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게 중론이다. ‘진승현 게이트’의 핵심인 진씨의 정치권 로비 의혹을 파헤쳐야 하기 때문.

이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로비 대상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소위 ‘진승현 리스트‘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진승현 리스트‘는 이미 지난해 검찰수사때부터 그 실재 여부를 두고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김 전 차장이 지난해 진씨의 검찰 출두 직전 그에게 자신의 지장이 찍힌 로비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한 뒤 이를 넘겨받았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제기되면서 리스트는 또 다시‘태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김 전 차장이 지난해 이 리스트를 무기로 정치권 실세들을 찾아다니며 “검찰 수사를 막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는 협박성 구명로비를 벌였다는 소문도 나돌아 리스트가 존재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혐의 드러나면 누구라도 수사” 강경

검찰도 이번만큼은 철저한 수사로 그동안 실추된 명예를 회복한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도 최근 “범죄혐의가 드러날 경우 누구라도 수사한다는 원칙에 변함이 없다”며 “리스트를 입수할 경우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최근 검찰의 입장을 고려하면 실제로 상당한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개청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엄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위기상황에 놓인 검찰이 또 다시 ‘태산명동서일필’식으로수사를 마무리할 경우 쇄도하는 비난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게 우선적인 이유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권 수사가 지지부진할 경우 자칫 지난해 김 전 차장의 구명로비를 받았던 검찰 고위간부쪽으로 의혹의 무게중심이 옮겨질 수 있다는 점.

이들은 여전히 검찰내 핵심요직에 있어 수사팀에게는 ‘뜨거운 감자’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검찰이 진씨의 구속만으로 수사를 마무리짓는 등 부실수사를 벌인 흔적이 속속 드러나 “김 전 차장의 로비가 먹혀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당사자들은 간접적으로 “김 전 차장의 방문은 받았으나 로비시도는 없었다”고 해명하고 나섰지만 당분간 결백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미 지난해 진씨 수사를 맡았던 서울지검특수1부가 재수사를 담당하는 것이 온당하냐는 논란이 불거진 상황에서 검찰이 정치인 수사에 미적거리는 듯한 인상이라도 줄 경우 당장 특별검사에게 수사를 맡겨야 된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결국 검찰의 ‘명예회복’ 및 ‘조직보호’ 차원에서라도 몇 명의 정치인은 구속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과연 정치권이 고분고분 검찰의 수사에 응할지는 미지수다. 그렇지 않아도 언론의 ‘진승현 리스트’보도를 놓고 야당 일각에서는 ‘물타기 차원에서 검찰이 흘리는 것 아니냐’는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검찰 관계자도 “‘몇 개월이 걸리더라도 수사를 마무리한다’는 검찰 입장에 불편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벌써부터 정치권의 ‘견제’가 들어오고 있음을 시사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자칫 ‘정치공세’라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만큼 정치권에 대한 검찰 수사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면서 진행될 전망이다.

2001년 한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각종 ‘게이트와 리스트’는 최근 ‘윤태식 리스트’까지 보태져 새해에도 계속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진석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1/12/28 13:32


박진석 사회부 jseok@hk.co.kr